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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 처형에 대해 대중들은 절단된 머리가 눈을 깜빡였다든지, 말을 했다든지, 눈동자를 움직였다든지, 입을 움직였다고 이야기해 왔다. 여러 국가의 [[해부학자]]들과 과학자들은 [[1956년]] 전까지 잘린 사람 머리에 대한 명료한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불가피하게 결과물들은 이야깃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죄수의 이름을 부르니 대답했다든지, 바늘로 찌르자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는 등의 진술은 의식이 수반된 행위가 아닌, 근육이 무작위적으로 움직였거나 자동 반사 행동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대뇌 혈액이 대량으로 유출될 경우 수 초 내로 인간의 두뇌는 의식을 잃을 수 있다.
 
== 붙임 ==
단두대, 길로틴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사형도구. 프랑스 혁명시기 죄수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길로틴은 더 많은 죄수를 죽일 수 있는 효율적인 사회도구다”
[[파일:Joseph-Ignace Guillotin cropped.JPG|섬네일|길로틴의 아버지
Joseph-Ignace Guillotin
]]
‘길로틴의 아버지’, ‘잔학한 발명가’로 묘사되며 결국 자신이 만든 길로틴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알려진 조세프 이그나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그는 사실 사형폐지론자였다. 문학 교수, 외과 의사, 삼부회 의원을 지낸 엘리트였던 기요탱 박사는 의회 활동을 통해 사형제 폐지를 꾸준히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참수형은 가장 덜 고통스러운 사형 방식으로 알려져 귀족들만이 받을 수 있는 형벌이었다. 다른 사형수들은 화형, 교수형, 능지처참 등을 당했다.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기요탱은 길로틴을 직접 만들지 않았다. 기요탱은 인도적인 사형기구 제작을 위한 모임을 조직했고 여기 속했던 외과의사 앙트완 루이가 기요탱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단두대를 발명했다.
 
단두대는 처음엔 앙투완 루이의 이름을 따 ‘루이제트’로 불렸으나, 도입에 앞장선 기요탱의 이름을 따라 '기요탱’이라고 불리게 됐다. <ref>{{뉴스 인용|url=http://hooc.heraldcorp.com/view.php?ud=20160526000934|제목=끔찍한 사형도구? 숨겨진 길로틴 이야기|날짜=2016-05-26|언어=ko|확인날짜=2017-10-16}}</ref>
 
기요탱은 사형폐지를 주장한 자신의 이름이 사형 도구로 사용되자 평생을 가슴 아파했다.
 
1792년 4월 25일 노상강도 니콜라 펠티에르 첫 번째 희생자가 된 뒤, 단두대에서 루이 16세, 마리 앙투와네트 등 혁명과 공포정치 시기에만 수만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기요탱이 단두대에 희생됐다는 이야기와 달리 그는 74세인 1814년 5월 26일 자연사했다.
 
유가족들은 프랑스 정부에 단두대 명칭을 변경해 달라는 청원이 거절당하자 성씨를 바꿨다고 전해진다.
 
프랑스는 1939년까지 단두대 공개처형을 집행했으며,1977년 강간범 하미다 장두비를 끝으로 단두대 처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결국, 사형제도는 프랑스에서 1981년에 폐지된다.
 
== 비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