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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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의 생애 첫 출전은 결혼한 이듬해였던 1558년 2월 5일에 있었다.<ref name="요시다33"/> 그의 임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측으로 넘어간 [[스즈키 시게타쓰]]({{lang|ja|鈴木重辰}})가 다스리고 있던 [[미카와 국]] 서부의 [[데라베 성]]을 공략하는 것이었다.<ref name="요시다33"/> 이에야스는 방화 작전으로 데라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ref name="이길진38"/><ref name="이길진39">이길진, 39쪽</ref>, 히로세 성·고로모 성·이호 성에서도 같은 방화 전법으로 오다 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ref name="이길진39"/>, 오다카 전투에서는 밤을 틈타 군량미를 전달하기 위해 기습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ref name="요시다35">요시다 외, 35쪽</ref>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일본도|칼]]을 내리고, 야마나카의 땅을 봉토로 주었다. 또한 승전의 공으로서 이에야스는 개명을 요청하여, 자신의 할아버지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 모토야스로 이름을 바꾸었다.<ref name="요시다33"/><ref name="이길진40">이길진, 40쪽</ref> 1560년, 이에야스의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에 도취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5,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 씨의 본거지인 [[기요스 성]]을 포위하였으나, 곧 오케하자마 산으로 옮기는 빈틈을 보였고, 결국 기습을 당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전투 중 [[모리 요시카쓰]]에게 죽음을 당했다.<ref name="고미226"/><ref name="요시다35"/><ref>이길진, 41 ~ 44쪽</ref> 한편 이마가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군 중 가장 뒤늦게 적지를 탈출했지만, 노부나가의 추격을 받지는 않았다.<ref name="이길진47">이길진, 47쪽</ref> 그리고 오카자키에 들어온 후에도 성에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다이주 사(大樹寺)에 머물러있다가<ref name="이길진47"/>, 5월 23일 오카자키 성의 [[조다이]]였던 [[미우라 고즈케노스케]]가 슨푸로 돌아간 후 오카자키 성으로 입성함으로써 인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ref name="이길진47"/>
 
그 후 몇년 간 이에야스는 독립을 선언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며, 이마가와 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와리 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다 씨의 관심이 소홀했던 미카와 국 서부의 오다 씨 성채들을 자주 공격하였다.<ref name="이길진48">이길진, 48 ~ 49쪽</ref> 이처럼 이에야스는 [[혼다 다다카쓰]], [[이사카와이시카와 가즈마사]], [[고리키 기요나가]],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을 앞세워 마쓰다이라 씨의 확장에 몰두하다가, 1561년 이마가와 씨를 배신하였다.<ref name="요시다41">요시다 외, 41쪽</ref> 한편 노부나가는 [[미노 국]]의 [[사이토 요시다쓰]]와의 전쟁을 앞두고 [[미즈노 노부모토]]에게 이에야스 측과의 교섭을 의뢰했고<ref name="이길진48"/>, 미즈노의 중재 하에 이에야스는 1562년 [[기요스 성]]에서 비밀리에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 동맹을 결성하였다.<ref name="이길진50">이길진, 50 ~ 51쪽</ref> 기요스 동맹은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ref name="요시다41"/> 이에야스가 오다 씨와 비밀 동맹을 결성한 것을 알아챈 이미가와 씨의 계승자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이에야스를 소환하려 했으나, 이에야스가 병을 핑계로 오려 하지 않자 분노하여 미카와 중신들의 처자를 기둥에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磔刑)이라는 가혹한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는 이마가와 씨의 중요한 일족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자식들은 죽이지 못했다.<ref name="이길진50"/> 그러자 이에야스는 [[마쓰이 다다쓰구]] 등에게 명해 [[니시고리 성]]을 공격해 이마가와의 측근으로 요시모토의 처남이었던 [[우도노 나가테루]]의 두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 우도노를 슨푸에 잡혀 있는 이에야스의 가족과 교환하였다.<ref name="이길진50"/><ref name="요시다42">요시다 외, 42쪽</ref> 그리고 이듬해 이에야스는 장남의 이름을 노부나가의 이름에서 딴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1559년)|노부야스]]라 칭하고,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와 정략 약혼을 했으며<ref name="요시다42"/>, 7월에는 모토야스라는 이름을 이에야스(家康)로 바꾸어 이마가와 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였다.<ref name="요시다42"/><ref>이길진, 52쪽</ref> 한편 [[조구 사]], [[쇼만 사]], [[혼쇼 사]] 등 3대 사찰을 중심으로 미카와의 [[일향종]]이 벼의 징수 문제로 [[잇키]]를 일으켰다.<ref name="이길진55">이길진, 55 ~ 57쪽</ref> 이에야스는 사사키(佐崎)에 있는 조구 사에서 사사키 성주 [[스가누마 사다아키]]에게 비축을 위한 군량미를 징수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스가누마는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수확이 이루어지던 조구 사에서 억지로 벼를 징수해 갔고, 이에 조구 사에서는 혼쇼 사와 쇼만 사에 격문을 보내 반란을 일으켰다.<ref name="이길진55"/> 이에야스는 일향종의 잇키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데, 이 때문에 이에야스의 가신 중 [[사카이 다다나오]], [[기라 요시아키]], [[아라카와 요시히로]], [[하치야 한노조]] 등, 일향종을 따르는 이들이 대부분 적으로 돌아서 잇키에 가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ref name="이길진55"/><ref name="이길진58">이길진, 58 ~ 59쪽</ref> 이 때 이에야스는 [[조총]]탄을 두 발이나 맞았으나 갑옷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ref name="요시다43">요시다 외, 43쪽</ref><ref name="이길진60"/> 잇키는 1563년 2월 이에야스가 주동자 [[시쓰다 사쿠주로]]를 죽이고, 주동자를 추방한 다음 가담한 가신들을 용서함으로써 끝났는데, 이후 이에야스는 미카와 국 내의 일향종 사원을 전부 부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ref name="요시다43"/><ref name="이길진60">이길진, 60 ~ 61쪽</ref>
 
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내정을 어느 정도 정비한 후 마침내 이마가와 씨의 본거지를 치기로 했다.<ref name="요시다46">요시다 외, 46쪽</ref> 이에야스는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명하여, 미카와 국 동부에 있는 이마가와 씨의 최대 거점인 [[요시다 성]]을 공략하여 점령하도록 했다.<ref name="이길진62">이길진, 62쪽</ref> 그 직후에는 [[혼다 히로타카]]가 [[다하라 성 (미카와 국)|다하라 성]]을 점령하며 미카와 국 동부에서 이마가와 씨를 완전히 몰아내 미카와 국을 통일하였다.<ref name="이길진62"/> 이와 동시에 이에야스는 [[이시카와 이에나리]]와 사카이 다다쓰구를 가로(家老)로 임명함과 동시에 각각 미카와 국의 서부와 동부의 지배를 맡겼다.<ref name="이길진62"/> 또한 [[혼다 시게쓰구]], [[고리키 기요나가]], [[아마노 야스카게]]를 [[부교]](奉行)로 임명하였다.<ref name="이길진62"/> 통치 체제를 정비한 후 이에야스는 다시 이마가와 씨의 영지인 [[도토미 국]]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토미 공략은 오다 노부나가 -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 이마가와 우지자네 간의 복잡한 동맹 관계로 인하여 주춤하였다.<ref name="이길진63">이길진, 63 ~ 64쪽</ref> 그 동안 이에야스는 1566년 칙허에 따라 성씨를 [[세이와 겐지]] 계통의 도쿠가와로 바꾸었다.<ref name="이길진63"/><ref>요시다 외, 45쪽</ref> 이듬해 정월에는 종5품 미카와노카미 관직을 받았다.<ref name="이길진63"/> 또한 다케다 신겐의 동맹 파기를 이용해, 이에야스는 신겐과 이마가와 씨의 영지를 두고 [[오이 강]]을 경계로 분할한다는 이른바 [[가와기리의 약정]]을 맺어 동맹을 결성하였다.<ref name="요시다46"/><ref name="이길진63"/> 다케다 신겐은 협정에 따라 1568년 12월 [[슨푸 성]]을 점령하고, [[도토미 국|엔슈]]({{lang|ja|遠州}})를 공격하고 이에야스는 이듬해 [[하마마쓰 시|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신겐의 배신에 따라 본성을 오카자키에서 히쿠마로 옮겨, 하마마쓰 성이라 명명하였다.<ref name="고미226"/><ref>요시다 외, 47쪽</ref><ref name="이길진66">이길진, 66쪽</ref> 또한 [[가케가와 성]]까지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추적하여 그를 처가가 있는 [[이즈 국]]으로 낙향시켜 사실상 이마가와 씨를 멸망시키며 도토미와 미카와의 전역을 확보한다.<ref>이길진, 65쪽</ref> 한편 1568년 이에야스의 동맹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 국]]에서 가장 인접한 [[야마토 국]]을 획득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교토로 입성해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ref name="이길진66"/><ref>요시다 외, 48쪽</ref> 1570년 노부나가가 [[에치젠 국]]과 [[오미 국]]을 공격할 때 이에야스도 참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퇴각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ref>요시다 외, 49쪽</ref> 노부나가는 같은 해 6월에 다시 오미와 에치젠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를 틈탄 다케다 신겐의 교토 침공 시도를 막기 위해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다시 진군, [[아자이 나가마사]]·[[아사쿠라 요시카게]]와의 [[아네가와 전투]], 신겐과의 [[미카타가하라 전투|미카타가하라]]와 [[나가시노 전투]]를 거치며 입지를 크게 넓혀갔다.<ref>요시다 외, 52 ~ 53쪽</ref><ref>요시다 외, 54 ~ 55쪽</ref><ref>이길진, 66 ~ 72쪽</ref> 비록 이 과정에서 쓰키야마도노와 아들 노부야스를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ref>요시다 외, 56 ~ 57쪽</ref><ref>이길진, 98 ~ 105쪽</ref> 이에야스는 1580년 간토의 호조 씨와 다케다 씨 간의 동맹 관계 파기를 이용하여 [[도토미 국]] 동부를 점령하였다.<ref>요시다 외, 58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