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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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일본 교토 고산사의 원효 진영
|출생일 = [[617년]]
|출생지 = {{개행 금지|[[신라]] [[경주시금성 (신라)|금성]]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사망지 = [[신라]] [[경주시금성 (신라)|금성]]에서 병사
|사망일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70세)
|장르 = 시문학,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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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此師殆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며 요석궁의 홀로된 둘째 공주—흔히 요석공주—를 짝되게 하니, 과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ref>신라십현의 한 사람</ref> 을 낳았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이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금성 (신라)|금성]]시내에서 춤추며 노래부르는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났는데, 그가 자발적으로 혹은 관리가 떠밀어서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이후 [[무열왕]]은 공주에게 옷을 말리고 쉬게 하도록 명을 내려 원효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은 [[설총]]이 한국 [[유교]]의 시조라 하여 '지금(일연이 살던 당시)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실계(失戒)한 원효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박]]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를 따라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 사람 중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그렇게 컸다. 그러나 원효의 춤과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대들이 생계에 지장있음을 호소하자 그는 이를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