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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
[[파일:Belisarius mosaic.jpg|섬네일|벨리사리우스의 모자이크]]
|이름 = 벨리사리우스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5년]] - [[565년]])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명한 장군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장군이다.
|현지어표기 = Βελισάριος
|생애 =
|그림 = Belisarius mosaic.jpg
|그림크기 =
|설명 = [[비잔티움 제국 육군|비잔티움 제국군]]이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것을 기념해 지어진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왼편에 위치한 벨리사리우스로 여기지는 인물
|태어난 곳 = 505년 경 <br/> 게르마네 (오늘날 [[불가리아]] [[사파레바 바냐]])
|죽은 곳 = 565년 3월 경 (50/60세) <br/> [[칼케돈]] [[루피니아나이]]
|본관 =
|별명 = 폴란드의 [[피에르 테라일 셍귀니엘 바야르|바야르]]
|종교 =
|부모 =
|배우자 = [[안토니나 (벨리사리우스의 아내)|안토니나]]
|자녀 =
|친척 =
|복무 = {{국기나라|비잔티움 제국}}
|복무 기간 =
|최종 계급 = 장군
|근무 = [[비잔티움 제국 육군]]
|지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서훈 내역 =
|기타 이력 =
|서명 =
|웹사이트 =
}}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5년]] - [[565년]])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명한 장군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장군이다.
 
== 초기 생애 ==
[[일리리아]](현재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군에 입대했다. [[530년]] [[다라의 전투]]에서 [[사산 제국]]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으나 [[531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칼리니쿰의 전투]]에서 완패,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었다.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교가 되었다.
 
== 군사적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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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달족과의 전쟁 ===
[[533년]] [[아프리카]]로 항해해 [[레프키스 마그나]] 근처에 상륙, 당시 [[반달족]]이 수도로 하고 있던 [[카르타고]]로 향했다. 반달왕국의 왕 [[겔리메르]]를 맞은 벨리사리우스의 비잔틴군은 카르타고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에서 [[아드 데키미움의 전투]]를 벌여 완패했다. 그러나 겔리메르의 조카가 전투에서 죽어 전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벨리사리우스는 [[티카메론의 전투]]에서 반달군을 격파, [[534년]] 항복하게 만들었다.
 
=== 동고트족과의 전쟁 ===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나르세스]]를 [[동고트 왕국]]전선에서 해임하고 벨리사리우스를 투입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빠르게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했다.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수복하고 [[540년]] 동고트 수도인 [[라벤나]]를 점령했다. 동고트족을 비잔틴 황제는 믿지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괜찮다고 여겨 그에게 왕국 절반을 주었고,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왕관을 받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분노를 샀다.
 
수도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재투입되었으며, 빼앗긴 [[시리아]]를 놓고 페르시아와 한동안 교전을 벌이다가 [[545년]] 금 5천 파운드를 전쟁 보상금으로 페르시아에 넘겨주는 대신 페르시아군이 로마령을 5년간 침공하지 않는 것으로 강화협정을 맺었다.
 
[[541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그가 옹립한 동고트 왕 [[일디바드]]는 암살되었고 [[토틸라]]가 왕이 되어 있었으며, 토틸라의 동고트군은 비잔틴군을 무섭게 몰아내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토틸라에 대해 공세로 들어갔으나, 머지않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나르세스]]로 교체되었다.
 
== 말년 ==
[[559년]] 벨리사리우스는 [[도나우 강]]을 건넌 [[불가르족]] 전선에 투입되어 그의 장수로서 경력의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562년]]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횡령 혐의로 고소되어 징역이 선고되었으나,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프로코피우스]]가 꾸며낸 모함이었다. 황제는 곧 벨리사리우스를 풀어주었다.
 
[[565년]]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Authority contr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