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영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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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영화'''(實驗映畵)는 국내에서 통상적으로 일본에서 사용하던 영화 용어를 번역한 것으로 간주해왔다. 일본은 이미 1960년대 부터 실험영화제가 열렸으며, 많은 영화 감독들이 다양한 실험영화를 제작해 왔기 때문에 여타 극영화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실험 영화라는 용어 자체는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극영화, 다큐멘터리와 같이 어떤 특정한 형태 혹은 장르의 영화를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2016년 서강대학교 오준호 교수에 의해 유현목 감독의 <손>(1966/67)의 원본 프린트를 캐나다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ref>{{웹 인용|url=http://www.okulo.kr/2016/05/critique-001.html|제목=유현목의 <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하나의 가설|성=오|이름=준호|날짜=2016년 5월|웹사이트=OKUL0 Journal of cinema and the moving image|출판사=|확인날짜=}}</ref>된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에 수집되어 일반에 공개 되기 전까지 한국에서 실험영화가 갖는 의미는 쉽사리 파악되지 못했다. 오랜기간 동안대부분의 영화 연구 서적 혹은 논문에서는 유현목 감독이 실험영화 관련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작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몇 편의 실험영화를 제작했다고 반복적으로 이야기 되어왔다. 유현목 감독의 <손>이 해외 영화제 출품을 위해 제작된 사실과 이 작품이 복원되기 전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로 간주되어 왔던 한국의 대표적인 개념미술 작가인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1969)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당대의 실험 영화들이 일본과 어떠한 교류가 있었다거나 그들이 일본에서 실험영화를 접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아방가르드 영화 운동에 대해서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거나 유현목의 경우처럼 당시 직접 해외의 영화제 프로그램을 참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당시 많은 원로 작가들이 앤디 워홀이 실험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러 지면을 통해서 알고 있었고, 김구림은 1970년대 초반 일본으로 건너가 비디오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을 통해서 볼 때 당시에 일본에서도 많은 실험영화가 만들어 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실험영화라는 용어는 어떻게?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의 신문기사로 부터 답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브뤼셀 세계 박람회의 일환으로 개최된 실험영화제에 대한 소개 단신이 당시 한국의 신문에 實驗映畵라는 한자어로 표기되어 있다. 이 단어는 experimental film의 번역어라 할 수 있다. 당시 벨기에에서 개최된 이 중요한 실험영화제의 자세한 맥락은 추후 논하기로 하고, 당시 신문기사는 박람회를 소개하면서 지금 까지 보았던 만들어진 영화와는 다른 최신의 기술로 제작된 영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다른"영화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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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