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우: 두 판 사이의 차이

2,866 바이트 제거됨 ,  6년 전
잔글
Madras119(토론)의 편집을 TedBot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Madras119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잔글 Madras119(토론)의 편집을 TedBot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1번째 줄:
{{팔라우 표}}
'''팔라우 공화국'''({{llang|pau|Beluu er a Belau}}, {{llang|en|Republic of Palau}}, {{문화어|벨라우}})은 [[태평양]] 서부의 [[팔라우의 행정 구역|연방 국가]]로서, [[필리핀]]의 남동쪽, [[인도네시아]]령 [[서뉴기니]]의 북쪽에 인접한 섬나라이다. [[2006년]]에 [[코로르]]에서 [[응게룰무드]]로 [[수도]]를 옮겼다. 공용어는 [[팔라우어]]와 [[영어]]이다.
 
다이빙에 열광적인 사람이라면 열대의 팔라우를 수중의 경이로운 세계라고 마지막에 표현할 것이다. 전쟁에 열중한 사람이라면 2차 대전의 마지막 날로부터 군도의 중요성을 기억할 것이다. 팔라우에 대해 모르는 것으로 마이크로네시아에서 가장 풍부한 동식물군이 육상과 수중에 분포하는 나라이며, 미국이 팔라우를 점령하기 전 엘비스 프레슬리의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태평양 섬의 트러스트 테레토리에서 독립한 국가로 적은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인구의 다수는 수도인 코로르에 집중돼있다. 팔라우는 여러분이 대도시에 원하는 중앙 메트로폴리탄을 갖고 있지만 도시의 외곽 여전히 매력적이며, 해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교통수단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가하기도 하다.
 
== 역사 ==
초기의 팔라우인들은 여성에 의해 종족과 경제가 유지된 모계와 가모장제도에 의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팔라우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은 1543년의 스페인인 루이 로페즈 드 빌라로보스로 스페인은 1686년 섬에 대한 소유권을 제기했으나 발전이나 식민지화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1783년에 발생한 영국인 헨리 윌슨(Henry Wilson) 선장의 선박의 팔라우의 울롱 섬 주변에서 난파로 인해 영국과의 접촉이 시작된다. 코로르의 족장인 이베둘(Ibedul)은 윌슨 선장의 선박을 보수하고 아들인 레부(Lebuu) 왕자를 선원들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레부는 영국 도착 직후 천연두로 사망했으나 왕자와 영국인들과의 접촉은 팔라우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다. 영국은 팔라우의 무역 파트너로 스페인에게 재점령 당한 1885년까지 100년 이상 무역 상대국이 됐다. 
 
스페인 선교사는 기독교와 알파벳을 전래했으며 스페인-미국 전쟁으로 약해진 스페인은 팔라우를 독일에 판매한다. 독일은 1899년 통제권을 획득해 서양에서 전래된 질병으로 주민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한다.
 
[[16세기]] 중엽부터 [[필리핀]]과 함께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고, [[1899년]]에 [[독일]]이 이 지역을 [[마리아나 제도]]·[[캐롤라인 제도]]와 함께 스페인으로부터 매입하였다. [[코프라]]를 생산하고 [[앙가우르 섬]]에서 [[인산염]]이 채굴되었다(1955년에 고갈). [[제1차 세계 대전]] 후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위 두 제도 및 [[마샬 제도]]와 함께 [[일본 제국]]의 [[위임통치령]]([[국제 연맹]]이 통치를 위탁한 지역)인 [[남양 군도]]가 되었다. [[1922년]]에 [[코로르]]에 일본 제국의 통치 기관인 [[남양청]](南洋廳, {{ja-y|南洋庁|なんようちょう|난요초}})이 설치되었다. 남양청은 행정 및 사법 업무를 관할하였고, 산업 개발 및 [[교육]](특히 [[일본어]] 교육) 사업을 수행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주요기지로 있다가 [[1944년]]에 [[펠렐리우 전투]]로 미군이 점령하였다.
 
일본은 팔라우를 1914년부터 2차 대전 종료까지 점령했다. 이 기간은 팔라우의 문화가 급격하게 변화한 시기로 무료 공립학교가 개교되고 일본어의 방언이 섬에 전래됐으며 마을 족장은 일본 식민지 통치자에 의해 영향력을 상실한다. 코로르가 도로 포장과 전기와 파이프를 통한 물의 공급을 통해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되고 수 천명의 일본인, 한국인, 오키나와인 노동자가 이주했으며 전통을 계승하던 패턴은 자신의 땅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산산이 파괴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이 지역은 [[미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에 자치령이 되었고, [[1982년]] 미국과의 '자유연합협정' 체결로 미군 기지가 들어서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아 왔다. [[1994년]] [[10월 1일]]에 공화국으로 완전 독립하여 그 해 12월에 [[유엔]]에 가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