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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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들 가운데 [[라틴족]]은 [[라티움]]을 중심으로 확장하였고, 그들이 사용하던 [[라틴어]]는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에 따라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과 유럽의 상당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4세기 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5세기 말 [[고대 후기]]에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동]]·[[서로마 제국|서]]로 분할되었으며, 분할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 일어났다. [[랑고바르드인]]은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하고 568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남부와 동부 연안은 11세기까지도 여전히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은 [[프랑크 왕국]]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중세 이탈리아|중세]]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으나, 사실상 독립적인 [[도시국가]]로서 [[해상공화국]]으로 발전였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있었던 [[이탈리아 전쟁]]의 결과, 이탈리아는 [[근세 유럽]]의 열강이었던 [[합스부르크 가]]의 [[압스부르고 스페인|스페인]]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 지배 되었으며,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제1제국]] 시기에는 프랑스의 속령이 되었다. 한편, 8세기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한 [[단신왕 피핀]]이 [[교황]]에게 영지를 [[피핀의 기증|기증]]한 것이 기원인 [[교황령]]은 19세기 후반까지 [[성좌 (가톨릭)|성좌]]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에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 국가]] 사상이 번졌고, 19세기 말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통일|통일]] 되었다. 1861년 성립된 이탈리아 왕국은 신속한 근대화와 함께 [[리비아]]와 [[아프리카의 뿔]] 지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각지와 지중해의 요충지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아 [[이탈리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의 숙적이 되었고, [[사라예보 사건]]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는 [[협상국]]의 일원으로 독일 오스트리아와 맞섰다.
 
1920년대에 들어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 [[이탈리아 파시즘]]은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주의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과 손잡고 [[주축국]]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을 벌였고, 1945년 [[이탈리아 파시즘]]은 [[연합국]]에게 격퇴되었다. 2차 대전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부렵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내전|내전]]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파르티잔]]과 [[피에트로 바돌리오|바돌리오 정부]]에 쫓겨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파시즘 망명 정부]]를 세운 무솔리니는 [[1945년 춘계 이탈리아 공세]]에서 패한 뒤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46년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 결과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ref>{{cite web인용|url=http://www.historyworld.net/wrldhis/PlainTextHistories.asp?groupid=3437&HistoryID=ac52&gtrack=pthc |title=History of ITALY |publisher=Historyworld.net |accessdate=24 April 2010}}</ref> 1946년 6월 2일 새 공화국이 출범한 뒤 이탈리아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 경제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한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일원이 되었고, [[NATO]]와 [[G7]] 그리고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회원국이 되었다. 오늘날 이탈리아는 경제, 종교, 군사, 문화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ref>"Italy plays a prominent role in European and global military, cultural and diplomatic affairs. The country's European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influence make it a major regional power." See ''Italy: Justice System and National Police Handbook'', Vol. 1 (Washington, D.C.: International Business Publications, 2009), p. 9.</ref><ref name="foreignaffairs.org">[http://www.foreignaffairs.org/20060501faessay85305/ben-w-heineman-jr-fritz-heimann/the-long-war-against-corruption.html foreignaffairs.org]| Ben W. Heineman, Jr., and Fritz Heimann speak of Italy as a major country or "player" along with Germany, France, Japan, and the United Kingdom, in "The Long War Against Corruption".</ref><ref name="Leonardis, 2003, p. 17" >M. De Leonardis, ''Il Mediterraneo nella politica estera italiana del secondo dopoguerra'', Bologna, Il Mulino, 2003, p. 17</ref><ref name="carabinieri.it">{{cite web인용|url=https://translate.google.com/translate?hl=en&sl=it&u=http://www.carabinieri.it/Internet/Editoria/Rassegna%2BArma/&sa=X&oi=translate&resnum=1&ct=result&prev=/search%3Fq%3Dhttp://www.carabinieri.it/Internet/Editoria/Rassegna%252BArma/%26hl%3Den |title=carabinieri.it |publisher=Google |accessdate=24 April 2010}}</ref><ref name="books.google.com">{{cite서적 book인용|url=https://books.google.com/?id=X4xw8-Oj9usC&pg=PA157&lpg=PA157&dq=regional+power+italy+in+europe#PPP1,M1 |title=books.google.com |publisher=Google Books |accessdate=24 April 2010 | isbn=978-0-415-14044-7|year=1998}}</ref>
 
== 선사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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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의 이탈리아 반도는 오늘날과는 지형이 달랐다. [[마지막 빙기]] 동안 [[엘바 섬]]과 [[시칠리아]]는 대륙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ref>[http://popular-archaeology.com/issue/september-2012/article/study-sheds-new-light-on-ice-age-mediterranean-settlers Study Sheds New Light on Ice Age Mediterranean Settlers], Popular Archaeology</ref>, [[아드리아해]]는 지금보다 훨씬 작아서 오늘날 [[포자 현|포자 지방]]의 [[가르가노]] 반도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베니스]] 지역은 당시엔 대륙 한 가운데의 습도 높은 평원이었다.
 
최초의 [[사람족]]이 이달리아 반도에 살았던 흔적은 85만년전 무렵에 형성된 [[몬테포기올로]] 유적이 있다.<ref name="nationalgeographic.it"/>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후기 [[홍적세]] 유적은 기원전 5만년 전 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구석기]] 유적도 발견되었다.<ref name="nytimes.com">{{cite뉴스 news인용| url=https://www.nytimes.com/2011/11/03/science/fossil-teeth-put-humans-in-europe-earlier-than-thought.html?scp=1&sq=kents%20cavern&st=cse | work=The New York Times | title=Fossil Teeth Put Humans in Europe Earlier Than Thought | date=2 November 2011}}</ref>
 
2011년 11월 옥스포드 방사성 탄소 가속기는 1964년 그로타델카발로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아기의 치아를 분석하여 그 연대를 4만 3천년에서 4만 5천년 전쯤으로 측정하였는데, 이는 유럽에 현생 인류가 전무하던 시기이다.<ref name="nytimes.com"/> [[리구리아 주]]와 롬바드리아 주의 [[발카모니카]]의 동굴, 사르디니아 주의 [[누라게]]와 같은 곳에서 선사 시대 후기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가장 오래된 미이라로 유명한 [[외치]]는 티롤 남부의 [[지밀라운]]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3천년 무렵인 [[동기 시대]]의 사람이다.<ref>GEORGES BONANI,1 SUSAN D. IVY112 IRENA HAJDAS,1'3 THOMAS R. NIKLA US and MARTIN SUTER, [http://digitalcommons.library.arizona.edu/objectviewer?o=http%3A%2F%2Fradiocarbon.library.arizona.edu%2FVolume36%2FNumber2%2Fazu_radiocarbon_v36_n2_247_250_v.pdf AMS 14C AGE DETERMINATIONS OF TISSUE, BONE AND GRASS SAMPLES FROM THE OTZTAL ICE MAN], RADIOCARBON, VOL. 36, No. 2, 1994, P. 247-25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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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디니아 주]]와 [[코르시카 섬]] 남부에는 기원전 1800년대에서 시작되어 기원후 2세기까지 존속하였던 청동기 문화인 [[누라기 문명]]이 있었다. 누라기 문명은 후반기엔 이미 로마화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그곳에 이미 있었던 거석 문화에서 비롯된 누라기 탑에서 비롯되었다. 누라기 문화보다 더 오래된 사르디니아의 거석 문화는 많은 [[고인돌]]과 [[선돌]]을 세웠다. 누라기 탑은 누가 언제 세웠는 지 알 수 없지만 유럽의 대표적인 거석 문화 가운데 하나이다.<ref>[http://www.ciaosardinia.com/eng/sardinia/the-nuraghis The Nuraghis], CiaoSardinia</ref>
 
누라기 문명은 해양 문명으로 지중해 각지와 교역하였다. 누라기 유적에선 [[발트해]]가 원산인 [[호박 (화석)|호박]]과 아프리카 유인원을 포함한 각종 동물을 묘사한 작은 청동 유물들과 함께 지중해 동부에서 만들어진 무기와 [[미케네]]산 도기 따위가 발굴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록된 해양인이 이들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있다.
 
== 철기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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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taly 400bC en.svg|기원전 400년 무렵의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밑으로 라티움, 삼니테, 이탈리오테, 마그나 그라이키아, 카르타고 등이 보인다. 이 당시에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특정 지역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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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인]]은 기원전 800년 무렵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서 문명을 꽃피웠다. 이들이 어디서 이주해 왔는 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전 시기의 [[빌라노반 문화]]와 연관있는 토착인이라는 설이 주류이나 이탈리아 북부나 [[근동]]에서 침입해 왔을 것이란 설도 있다.<ref>{{cite journal 저널 인용|vauthors=Achilli A, Olivieri A, Pala M, etal |title=Mitochondrial DNA variation of modern Tuscans supports the near eastern origin of Etruscans |journal=Am. J. Hum. Genet. |volume=80 |issue=4 |pages=759–68 |date=April 2007 |pmid=17357081 |pmc=1852723 |doi=10.1086/512822 |url=http://linkinghub.elsevier.com/retrieve/pii/S0002-9297(07)61106-9}}</ref> 오늘날 [[토스카나 주]] 인구의 데이터를 토대로 근동 인구와 유전적 유사성을 비교한 연구에서는 두 집단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현대인과 과거 에트루리아인을 곧바로 연결지을 수는 없지만, 토스카나 주 인구에 대한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를 본다면 에트루리아인은 신석기 시대 이래 중유럽에 정착한 토착 문화로 보인다.<ref name="plosone.org">{{cite journal저널 인용|url=http://www.plosone.org/article/info%3Adoi%2F10.1371%2Fjournal.pone.0055519|title=Origins and Evolution of the Etruscans’ mtDNA |journal=PLOS ONE |authors=Silvia Ghirotto, Francesca Tassi, Erica Fumagalli, Vincenza Colonna, Anna Sandionigi, Martina Lari, Stefania Vai, Emmanuele Petiti, Giorgio Corti, Ermanno Rizzi, Gianluca De Bellis, David Caramelli, Guido Barbujani |date=6 February 2013 |accessdate=2015-04-25 |doi=10.1371/journal.pone.0055519 |volume=8 |page=e55519}}</ref><ref>{{cite web 인용|url=http://forwhattheywereweare.wordpress.com/2013/02/08/were-the-etruscans-after-all-native-italians/ |title=Were the Etruscans after all native Italians? |work=For what they were... we are – Prehistory, Anthropology and Genetics |date=8 February 2013 |accessdate=2015-04-25}}</ref>
 
에트루리아인의 언어가 인도유럽어족이 아니었다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ref>[http://multitree.org/codes/ett Etruskish], MultiTree</ref> 남아있는 금석문에 보이는 낱말들 몇은 [[애게해]]의 [[림노스 섬]]에서 발견되는 고대 언어와 유사하다. 에트루리아인은 일부일처제 사회였고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족장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 연맹체였다. [[에트루리아 신화|에트루리아의 종교]]는 모든 것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다신교였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이 신들의 권능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고 인간은 신들을 달래거나 설득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에트루리아 문화의 강역은 [[아펜니노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탈리아 북중부 지역으로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작은 마을들이 이 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 연안은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들인 [[마그나 그라이키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이들 그리스의 도시들과 달리 [[귀족정]] 정치 체제가 두드러진 사회엿다. 에트루리아의 주된 산업은 광업으로 구리, 철과 같은 금속을 생산하고 교역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들은 금속 무역을 통해 지중해 서부 각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지중해 서부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과 함께 오늘날 프랑스 남부 연안과 카탈로니아 그리고 [[코르시카]]에 식민지를 건설한 [[페니키아]]가 해상 교역권을 두고 에트루리아인들과 경쟁하였다. 에트루리아는 그리스의 도시들과 겨루기 위해 [[고대 카르타고]]의 일원이었던 [[퓨니인]]들과 동맹을 맺었다.<ref name="historyone">{{cite서적 book인용|author=Larissa Bonfante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4QaXZky58FIC&pg=PA58&dq=Etruscan+League#PPR5,M1 |title=Etruscan life and afterlife|publisher=Google Books | accessdate=22 April 2009 | isbn=978-0-8143-1813-3|year=1986}}</ref><ref name="historytwo">{{cite서적 book인용|author=John Franklin Hall |url=https://books.google.com/books?id=bUhT7i7XhOAC&pg=PA198&dq=Etruscan+League |title=Etruscan Italy |publisher=Google Books | accessdate=22 April 2009 | isbn=978-0-8425-2334-9|year=1996}}</ref>
 
기원전 540년 무렵 일어난 [[아랄리아 전투]]는 딱히 누가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상태로 끝맺었지만, 이후 카르타고는 지중해 서부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에트루리아인들은 [[코르시카 섬]]을 장악하고 [[티레니아 해]] 북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기원전 480년 에트루리아와 카르타고의 연합군은 [[시라쿠사]]를 중심으로한 그리스의 마그나 그라이키아 도시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ref name="historyone"/><ref name="history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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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linunte - Templi Orientali (Temple E) 18.JPG|시칠리아 셀리눈테에 있는 [[헤라]]의 신전
파일:Magna Graecia ancient colonies and dialects-en.svg|thumb|이탈리아 남부의 고대 그리스 식민지<ref>{{Cite서적 book인용| author=Roger D. Woodard| title = "Greek dialects", in: The Ancient Languages of Europe| 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 year= 2008| page = 51| isbn = 978-0-521-68495-8}}</ref>{{legend범례|#cea980|그리스 서북인}}{{legend범례|#b5ad96|[[아카이아]]}}{{legend범례|#eacd85|[[도리스]]}}{{legend범례|#bebada|[[이오니아]]}}
파일:Femmes peucètes dansant, fresque.jpg|[[풀리아 주]] [[바리 현]]의 [[루보디풀리아]]에 있는 [[춤추는 사람의 무덤]]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 여성들이 군무를 추고 있다. 기원전 4-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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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년 로마 [[교황]]의 요청을 받은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침공하여 수도 라벤나를 함락시켰다. 랑고바르드의 왕족과 귀족은 동로마제국으로 망명하여 귀화하였고 왕국은 해체되었다. 피핀은 교황에게 랑고바르드 지역을 [[피핀의 기증|기증]]하였고, 이로서 교황은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실재적 영토를 갖는 군주가 되었다.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피핀 3세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카롤루스]]를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추대하였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여전히 동로마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레오 3세는 여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권위를 갖고자 하였다. 레오 3세의 이러한 행동은 1054년 공식화된 [[동서 교회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ref>게르하르트 슈타군, 장혜경 역,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종교학》, 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ISBN 978-89-0107-174-9, 173쪽</ref> 교황청은 서유럽 내에서 종교에 대한 독점권 권위를 갖고자 하였다. 주교의 임명권을 놓고 왕이나 공작, 백작과 같은 봉건 영주들과 교황청은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 1122년 맺어진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만이 주교를 서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 문제는 중세 기간 내내 민감한 쟁점이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해체한 뒤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대체한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이탈리아 왕국]]은 형식적으로 조직된 일종의 괴뢰정부였다. 랑고바르드 왕국이 존립하였을 당시 이에 대항하여 독립을 유지하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후로도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 유지되었다.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많은 도시들은 신성로마제국의 간섭에 대항하여 [[롬바르디아 동맹]]을 결성하였다. 1176년 신성로마제국과 롬바르디아 동맹 사이에 벌어진 [[레냐노 전투]]에서 동맹측이 승리함에 따라 롬바르디아 동맹에 속한 각 도시국가들은 신성로마제국에 잔존하되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는 자치를 허용받았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아말피 공화국]]과 같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이 독립된 주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이후 르네상스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ref>Stark, Rodney, ''The Victory of Reason'', New York, Random House, 2005</ref> 이렇다할 주도적 권력이 없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그에 딸린 주변 읍락을 지배하면서 상공업을 일으켰다.<ref>Skinner, Quentin,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 vol I: ''The Renaissance''; vol II: ''The Age of Reform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69</ref> 귀족들 역시 공화국의 일원으로서 지배 체계에 협력하였고, 공화국의 실권은 평민들이 장악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제국에서 벗어난 독립국의 자유를 누리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학과 공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은행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였다.<ref name="ReferenceA">Ferguson, Niall, ''The Ascent of Money: The Financial History of the World''. Penguin, 2008</ref> 훗날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 공화국]]을 장악하였던 [[메디치 가]] 역시 중세의 신분 질서 속에서는 평민에 불과하였다. 메디치가는 13세기 이후 상업에 뛰어들어 서서히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 가문으로 부상하였다.<ref>라우로 마르티네스, 김기협 역, 《메디치가 살인 사건의 재구성》, 푸른역사, 2008년, ISBN 978-89-9151-066-1,47-92 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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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유럽 전역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ref>J. R. Hale, '' A Concise Encyclopaedia of the Italian Renaissance''</ref><ref>J. H. Plumb, ''The Italian Renaissance – A Concise Survey of its History and Culture'' (1985)</ref>
 
[[중세 후기]]의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는 북부의 도시 국가에 비해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 14세기는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세워진 [[아비뇽 교황청]]에 착좌하는 이른바 [[아비뇽 유수]] 시기였다. 이로 인해 [[교황령]]에 속한 각지는 형식적인 느슨한 지배를 받을 뿐이었고, 로마 자체도 쇠락하여 여기 저기 폐허가 놓여 있었다. 아비뇽 유수기 이후에 로마 카톨릭은 [[서방 교회의 분열]] 사태를 겪으며 아비뇽과 로마 두 군데에서 각기 다른 교황이 즉위하여 서로를 반교황으로 부르며 대립하였고, 서유럽 전반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나폴리와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등지는 외국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북부는 독립된 도시 국가로서 발전하게 되었고, 지중해 해상 무역망을 독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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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는 《[[일 칸쵸니에레]]({{llang|it|Il Canzoniere, 노래집}})》과 같은 [[소네트]]를 발표한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그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데카메론]]》 의 작가 [[보카치오]]가 있다. 15세기의 유명한 시인으로는 《[[모르간테]]》의 [[루이지 풀치]], 《[[사랑의 오를란도]]》의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 《[[광란의 오를란도]]》의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등이 있다.
 
[[니콜로 데 니콜리]]와 [[포기오 브라치올리니]]는 고전 시대의 저자인 [[플라톤]], [[키케로]], [[비트루비우스]] 등의 원전을 다시 소개하였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아오스]] 등의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기의 저작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어 보존되었다가 르네상스 시기 다시 유럽으로 들어왔다. 유입되었다. 15세기의 시인이었던 [[폴리치아노]]와 플라톤주의 철학자였던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된 고전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였다. 레온티우스 필라투스는 [[호메로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지오바니 보카치오에게 주었다.<ref>{{cite web인용|url=http://maritain.nd.edu/jmc/etext/homp421.htm|title=History of Medieval Philosophy 421|work=nd.edu|accessdate=25 August 2015}}</ref><ref>{{cite web인용|url=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70836/Giovanni-Boccaccio/756/Petrarch-and-Boccaccios-mature-years#ref233443|title=Giovanni Boccaccio|work=Encyclopædia Britannica|accessdate=25 August 2015}}</ref><ref>{{cite web인용|url=http://abuss.narod.ru/renaissance/cambridge05.htm|title=Paul Oskar Kristeller HUMANISM (The Cambridge History of Renaissance Philosophy)|author=. .|work=narod.ru|accessdate=25 August 2015}}</ref>
 
16세기 초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궁정 생활에 필요한 예의 범절을 다룬 《[[궁정론]]》을 출간하였고, 비슷한 시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근대 [[정치철학]]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군주론]]》을 펴냈다.<ref name=counter>{{Harvcoltxt|Bireley|1990}}</ref><ref>Although he makes many references to classical sources, these references do not include the customary deference to [[Aristotle]] which was to some extent approved by the church in his time. {{Harvcoltxt|Strauss|1958|p=222}} says that "Machiavelli indicates his fundamental disagreement with Aristotle's doctrine of the whole by substituting "[[Chance (Ancient Greek concept)|chance]]" (''caso'') for "[[Nature (philosophy)|nature]]" in the only context in which he speaks of "the beginning of the world." Strauss gives evidence that Machiavelli was knowingly influenced by [[Democritus]], whose philosophy of nature was, like that of [[modern science]], [[materialism|materialist]].</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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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 Vinci Vitruve Luc Viatour.jpg|[[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제시한 인체 비례를 적용하였다.
파일:'David' by Michelangelo Fir JBU005.jpg|[[다비드 (미켈란젤로)|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파일:Florence Duomo from Michelangelo hill.jpg|[[피렌체 대성당]]의 돔 지붕은 벽돌로 만든 돔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ref>{{cite web인용|url=http://www.tripleman.com/index.php?showimage=737 |title=The Duomo of Florence &#124; Tripleman |publisher=tripleman.com |accessdate=25 March 2010}}</ref><ref>{{cite web인용|url=http://www.brunelleschisdome.com/ |title=Brunelleschi's Dome |publisher=Brunelleschi's Dome.com |accessdate=25 March 2010}}</ref>
파일:Sandro Botticelli - La nascita di Venere - Google Art Project - edited.jpg|[[산드로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 1468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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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등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는 당대와 그 이후의 시기 유럽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역시 전 유럽에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건축가로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안드레아 팔라디오]], [[도나토 브라만테]] 등이 있으며, 이들의 작품으로는 [[피렌체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말라테스타 성당]]과 같은 것들이 있다.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출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기존 활자에 비해 작고 이동이 쉬운 [[이탤릭체]] 활판을 발명하여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 크기의 책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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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taly 1494.svg|1494년 당시 이탈리아의 국가 현황
파일:Uccello Battle of San Romano Uffizi.jpg|thumb|[[파올로 우첼로]]가 그린 [[산로마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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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탈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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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ttle of Pavia 1525.PNG|루프레슈트 헬러가 그린 [[파비아 전투]]
파일:Habsburg Map 1547.jpg|1547년 당시 스페인 제국과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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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 일어난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의 침공에 북부 도시국가들이 대항한 전쟁이다. 전쟁의 발단은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공국]]과 남부의 [[나폴리 왕국]]간의 분쟁에서 비롯되었으나 프랑스가 개입하면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1506년부터 1516년까지 계속된 [[캉브레 동맹 전쟁]]으로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교황령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적하여 승리하였으나, 전리품 분배에서 교황과 베네치아가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베네치아는 동맹을 탈퇴하였다. 당시 정세 속에서 프랑스의 브루봉 왕가와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의 주도권을 놓고 대척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나폴리 왕국]]의 국왕을 겸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를 지지하는 이탈리아의 코냐크 동맹과도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코냐크 동맹 전쟁]]은 1525년 [[파비아 전투]]가 발단이 되어 1526년부터 153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피렌체 공방전 (1529년)|피렌체 공방전]]에서 피렌체가 항복함으로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승리하였다.<ref>{{cite web인용|title=Peace of Cateau-Cambrésis|url=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99311/Peace-of-Cateau-Cambresis|publisher=[[Encyclopædia Britannica]]|accessdate=4 December 2014}}</ref>
 
한편 1499년부터 1503년 사이 발칸 반도의 베네치아 속령은 [[오트만 제국]]과 [[오트만-베네치아 전쟁]]을 벌였다.<ref>John Julius Norwich, ''The Italians: History, Art and the Genius of a People'' (1983) p 165-6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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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17세기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변동이 있던 소란스런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압스부르고 스페인]]의 영향력이 증대하였고, [[종교개혁]]에 대항한 [[로마 카톨릭]]의 [[반종교개혁]] 역시 정점을 찍었다. [[갈릴레오 갈리레이]]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과학을 발전시켰고, 예술에서는 [[바로크]] 양식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경기 침체를 겪었다.
 
탐험가들이 이른바 [[신세계]]를 발견하면서 베네치아나 제노바와 같은 이탈리아의 주요 상업 도시들은 점차 유럽의 중심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last1=Martin|first1=John|last2=Romano|first2=Dennis|title=Venice reconsidered : the history and civilization of an Italian city-state, 1297 – 1797|date=2002|publisher=Johns Hopkins Univ. Press|location=Baltimore|isbn=978-0801873089|page=405|edition=Johns Hopkins paperbacks}}</ref> 게다가 스페인이 [[30년 전쟁]]에 뛰어들게 되자 이탈리아 각지에는 과중한 세금이 부가되었다. 이로 인해 1647년에는 어부였던 [[마사녤로]]가 주동한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ref>{{cite web인용|title=The 17th-century crisis|url=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297474/Italy/27710/The-17th-century-crisis|publisher=[[Encyclopædia Britannica]]|accessdate=6 December 2014}}</ref>
 
17세기 이탈리아에선 [[흑사병]]이 다시 번졌다. [[이탈리아 흑사병 (1629년 - 1631년)|1630년 이탈리아 흑사병]]이 이탈리아 북부에 퍼져 밀라노와 베네치아 같은 대도시의 백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해당 지역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숫자였다. <ref>{{cite서적 book인용|last1=Hays|first1=J. N.|title=Epidemics and pandemics their impacts on human history|date=2005|publisher=ABC-CLIO|location=Santa Barbara, Calif.|isbn=978-1851096589|page=103}}</ref> 1656년에 일어난 흑사병으로 [[나폴리 왕국]]은 인구의 43%가 사망하였다.<ref>{{cite web인용|last1=Fusco|first1=Idamaria|title=The plague in the Kingdom of Naples (1656–58): diffusion and mortality|url=http://www.iseg.utl.pt/aphes30/docs/progdocs/IDAMARIA%20FUSCO.pdf|publisher=Istituto di Studi sulle Società del Mediterraneo|accessdate=6 December 2014}}</ref>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당시 이탈리아의 경제 침체와 상업 중심지 기능 상실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ref>{{cite web인용|title=This Day In HISTORY. November 30, 1630|url=http://www.historychannel.com.au/classroom/day-in-history/973/16000-venetians-die-of-plague-this-month|publisher=[[History (U.S. TV channel)|History]]|accessdate=6 December 2014}}</ref> 경제사학자 앤거스 매디슨의 연구에 따르면 1500년 당시 이탈리아의 국내총생산은 프랑스의 106%에 달했으나, 1700년에는 75%에 불가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last1=Maddison|first1=Angus|title=Contours of the world economy, 1–2030 AD : essays in macro-economic history|date=2007|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location=Oxford|isbn=978-0199227204|page=379, table A.4|edition=1st}}</ref>
 
=== 18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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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의 몰락 ===
[[외젠 드 보아르네]]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조제핀]]과 그의 전남편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자작 사이의 아들이다. 조제핀이 나폴레옹과 결혼 한 후 나폴레옹의 측근으로 이탈리아에 부임하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외젠은 처가인 [[바이레른 왕국]]의 도움으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의 군주가 되고자 하였다. 또한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 임명된 나폴레옹의 측근 [[조아킴 뮈라]] 역시 나폴레옹 몰락 이후 퇴위되었으나 오스트리아와 내통하여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지위를 되찾고자 하였다.<ref>{{cite web인용|url=http://www.regione.piemonte.it/cultura/risorgimento/immagine/00402.htm|title=Proclamation of Rimini|year=1815|accessdate=21 February 2008}}</ref>
 
유럽 각국의 정체를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빈 회의의 결정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여러 강국들이 이탈리아에 개입하는 명분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획책하였고, 이들의 통일 움직임에 반대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수상이었던 프란츠 메데르니히는 빈 회의에서 "이탈리아란 이름은 지리학적 의미 외에 어떠한 것도 뜻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title=Between Salt Water And Holy Water: A History Of Southern Italy|author=Astarita, Tommaso|year=2000|page=264}}</ref>
 
=== 이탈리아 민족주의 ===
민족주의는 예술과 문학에서 먼저 일어났다. 초기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약혼자 (소설)|약혼자]]》({{llang|it|I Promessi Sposi|이 프로메시 스포지}})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명세를 얻어 널리 읽혔다. 독자들은 이 소설이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지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여겼다. 1827년 출판된 이 소설은 당해에 재판을 인쇄하였다. 1840년 출판본은 [[토스카나 방언]](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를 중심으로한 [[이탈리아 방언]])의 표준으로 여겨졌으며 일종의 문학 교과서로 읽혀졌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교황령]]을 [[성좌 (가톨릭)|성좌]]로부터 떼내고자 하였다. 당시의 [[교황 비오 9세]]는 [[로마 카톨릭]]이 정치적 박해를 가한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감옥에 갖혀있던 혁명주의자들을 석방하였고, 이들은 곧바로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결합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title=Pio Nono: A Study in European Politics and Religion in the Nineteenth Century|author=E.E.Y. Hales|publisher=P.J. Kenedy|year=1954}}</ref>
 
이탈리아 반도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특정인이나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피에몬테]] 출신의 사제였던 [[빈센초 죠베르티]]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교황이 다스리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통일 운동과 로마 카톨릭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1843년 《이탈리아의 도덕적 문명적 제1과제》를 출간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통일 운동 참가자들은 통일 이탈리아의 정체로 [[공화정]]을 지지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그의 수상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카밀로 벤소]]에 의한 통일 왕정 수립이 가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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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열강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자 카르보나리 운동은 교황령, 사르데냐 왕국,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롬바르디-베네치아 왕국]] 등의 이탈리아 반도 각지의 국가로 확산되었다. 각국의 지배자들이 카르보나리의 집회에 참석할 경우 사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하였으나, 1820년 이후 통일 완료까지 카르보나리는 통일 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지속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젊은 날 망명자로서 이탈리아 남부를 오갈때 카르보나르에 입회한 바 있다. 카르보나리는 나폴레옹 3세와 협력을 기대하였다.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를 느슨한 연방제로 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지만,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로 먼저 침공할 경우 사르데냐 왕국을 지원하겠다는 밀약을 맺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지 않았고 사르데냐 왕국은 기대한 바를 얻을 수 없었다.
 
[[주세페 마치니]]와 [[주세페 가리발디]]는 급진적 통일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제노바 출신의 마치니는 통일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통일 이탈리아가 로마를 수도로 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공화국이 되는 계획을 구상하였다. 1831년 출옥 후 마치니는 [[마르세이유]]에서 [[청년 이탈리아당]]({{llang|it|La Giovine Italia|라 죠비네 이탈리아}})를 결성하였다. 청년 이탈리아당은 "신과 민중"을 모토로 이탈리아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한편 [[주세페 가리발디]]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 뒤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도모하였다.
 
=== 사르데냐 왕국의 통일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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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피===
 
[[프란체스코 크리스피]](1818년 – 1901년) 은 두 차레에 결쳐 수상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87년에서 1891까지 그리고 1893년에서 1896년까지 재임하여 총 재임기간은 6년이었다. 역사학자 R.J.B. 보스워스는 크리스피에 대하여 파시즘 등장 이전에 가장 팽창주의적인 정책을 핀 인물로 평가한다. 크리스피는 군비를 확장하고 동맹이었던 독일과 영국에 대해 그의 적을 함께 공격하길 요청하는데 주정함이 없었다. 크리스피는 동아프리카의 식민지화를 추구하여 에디오피아에 군대를 파견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last=R.J.B. Bosworth|title=Italy and the Wider World: 1860–1960|url=https://books.google.com/books?id=VL1vjYQRR-0C&pg=PA29|year=2013|publisher=Routledge|page=29}}</ref>
 
크리스피는 한때 가리발디의 공화파에 몸담았었고 데프레티스 내각에도 참여하였다. 크리스피의 1기 내각에서 최대의 관심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는 것이었다. 크리스티는 이탈리아의 군비를 증강하고 팽창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와 함께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경계하여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 (1882년)|삼국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여전히 영토 분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삼국 동맹을 탈퇴하고 [[삼국 협상]]의 동맹국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크리스피는 데프레티스의 변화 정책도 이어 받아 1888냔 공중보건법을 시행하였다.{{sfn|Smith |1997|pages=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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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이탈리아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삼국 협상]] 역시 이탈리아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군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는 것만을 바랬다.<ref>William A. Renzi, ''In the Shadow of the Sword: Italy's Neutrality and Entrance Into the Great War, 1914-1915'' (1987).</ref> 이탈리아의 수상 [[안토니오 사란드라]]와 외무상 [[시드니 소니노]]는 전쟁을 기회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이탈리아 북부의 [[티롤]]과 역사적으로 베네치아의 영토였으나 중세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 상실하였던 [[달마티아]]를 비롯한 [[아드리아 해]] 넘어 발칸 반도 지역을 병합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국왕에게 조차 계획 수립 완료까지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움직였고 그 사이 다른 정치인들은 이들의 의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ref>{{cite journal저널 인용| last1 = Lowe | first1 = C.J. | year = 1969 | title = Britain and Italian Intervention 1914-1915 | url = | journal = Historical Journal | volume = 12 | issue = 3| pages = 533–548 | doi=10.1017/s0018246x00007275}}</ref>
 
사란드라의 야심은 삼국 협상과 이탈리아 사이에 맺어진 비빌 조약이었던 [[런던 조약 (1915년)|런던 조약]]으로 실현되었다. 그 뒤 사란드라가 수상직에서 물러났으나 어떠한 정파도 그를 대신할 권력을 쥐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사란드라는 다시 수상직에 올랐다. 이탈리아 내의 국민 대다수와 카톨릭, 그리고 정치인 다수는 참전을 두려워 하였고 전쟁에 반대하였다. 농촌 주민들은 전쟁을 질병과 같은 것으로 여겼고, 사업가들은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불안과 높아질 세금때문에 반대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었고 군사 역시 약체였다. 그러나 사란드라는 민족주의를 선동하였고 1915년 봄 이탈리아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개전의 명분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의 동의 없이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는 것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당의 중요 지도자였으나 참전에 찬성하면서 사회당과 결별하고 민족주의 선동가로 나섰다.<ref>Martin Clark, ''Modern Italy: 1871-1995'' (1996) pp 180-85</ref><ref>Dennis Mack Smith, ''Italy: A Modern History'' (1969) pp 292 – 30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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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전 정부는 노동 문제를 외면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물자 생산이 중요해지자 더 이상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사회당은 전쟁 참여에 부정적이었고, 사회당이 강세를 보이는 피에몬트와 롬바르디아를 중심으로 파업이 빈발하였다. 정부는 단체 교섭과 사회 보험 도입으로 노동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ref>Luigi Tomassini, "Industrial Mobilization and the labour market in Italy during the First World War," ''Social History,'' (1991), 16#1 pp 59–87</ref> 전쟁이 시작되자 대기업들은 전쟁 물자 생산을 크게 늘렸다. 19세기 말 창립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방산업체였던 [[안살도]]의 경우 고용 인력은 6천 명에서 11만 명으로 급증하였으며, 10,900 문의 대포, 3,800 대의 전투기, 95 척의 전함, 그리고 1천만 발의 포탄을 생산하였다. [[피아트]] 역시 고용 인력이 4천 명에서 4만 명으로 늘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생필품 비용이 크게 증가하였지만, 공업 생산력 역시 함께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농업 노동자는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늘어난 공업 고용력도 도시로 밀려드는 농촌 출신 빈민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는 없었고 인플레이션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ref>Tucker, ''European Powers in the First World War,'' p 375-76</ref>
 
삼국 협상과 함께 승전국이 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평화 조약을 맺고 동쪽과 북쪽에서 영토를 확장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author=Spencer C. Tucker|title=World War I: The Essential Reference Guide|url=https://books.google.com/books?id=axoADAAAQBAJ&pg=PA188|year=2016|publisher=ABC-CLIO|page=188}}</ref> 1919년 채결된 [[생제르맹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티롤 백국]]의 일부와 [[트리에스테]], [[이스트라 반도]], [[자다르]]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애초 런던 조약에 포함되었던 다른 지역을 병합하지는 못하였다. 이때문에 이탈리아 내에서는 전후 처리를 놓고 [[불구의 승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 파시즘 치하의 이탈리아(1922년 - 19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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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청 ===
1929년 무솔리니는 로마 카톨릭 교황정과 1860년 이후 지속된 로마의 관할권 문제인 [[로마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하였다.<ref>Smith, ''Italy,'' pp 40–443</ref>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카톨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는 [[바티칸]]이 이탈리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국가임을 인정하였고, 교황청의 이탈리아 내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하고, 로마 카톨릭의 교회법이 이탈리아 내에서 유효한 효력을 갖는 다는 것을 확인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author=Eamon Duffy|title=Saints and Sinners: A History of the Popes; Second Edition|url=https://books.google.com/books?id=MTWM6PjNvBMC&pg=PA340|year= 2002|publisher=Yale University Press|page=340|isbn=9780300091656}}</ref>
 
=== 외교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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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itler and Mussolini June 1940.jpg|무솔리니와 히틀러.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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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펀 J. 리는 세 가지 사항이 무솔리니의 외교 정책의 주요 사안이었다고 정리한다. 첫째는 자유주의 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아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1896년 에디오피아에서의 패전을 만회하려는 이유에서 에디오피아에 대한 압박이 계속되었다. 둘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일어난 손실을 만회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할양받은 영토는 막대한 전쟁 비용의 댓가로 여기기엔 너무 작았다. 파쇼 정권은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가 얻은 이익이 오히려 더 클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셋째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제현하는 것이었다. 이는 무솔리니의 공약이기도 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last=Stephen J. Lee|title=European Dictatorships, 1918–1945|url=https://books.google.com/books?id=u-mm5UDlzBEC&pg=PA157|year=2008|publisher=Routledge|pages=157–58}}</ref>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유럽의 강자가 되도록 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하고 지중해에서 패권을 확보하겠다고 공약하였다. 파시스트들은 선동의 목적에서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라틴어로 우리의 바다라는 뜻이다. 파쇼 정권은 이를 위해 지중해의 주요 거점을 탈취하였다. 1923년 [[엔리코 텔리니]] 제독이 암살당한 것을 이유로 일어난 [[코르푸 사태]]의 결과 그리스령이었던 [[케르키라 섬|코르푸]]를 점령하였고, 1925년에는 알바니아를 사실상 [[보호령]]으로 삼았다. 프랑스와의 관계는 초기엔 프랑스 영토내 이탈리이아인들의 귀환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는 등 우호적이었으나<ref name="Smith_3">Smith. 1983. p172</ref>, [[나치 독일]]의 수립이후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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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이탈리아 점령지에서 파시스트 군대와 함께 [[아르데아티네 학살]], [[산타나 디 스타체마 학살]]과 같은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1944년 6월 연합군은 로마에서 독일군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북부의 산악 지역에 대한 공략은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1945년 봄까지 지연되었다.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니는 스위스 국경으로 도주하다 [[이탈리아 공산당]] 진영의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었다. 다음 날 [[국민해방위원회]]는 무솔리니에 대해 사형을 의결하고 처형하였다. 처형된 시신은 다른 15명의 파시스트와 함께 밀라노에 있는 주유소에 내걸렸다. 파시스트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고딕 전선]]은 1945년 5월 2일 무너졌고, 파시스트군은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바도글리오 내각은 9개월 정도 유지되엇고 1944년 6월 9일 반파쇼 정치지도자인 당시 70세의 [[이바노에 보노미]]가 수상이 되었으나 한 달만에 사임하고 [[페루치오 파리]]가 수상이 되었다. 페루치오 파리는 파르티잔 출신으로 1945년 6월까지 내각을 이끌었으며, 이후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1946년 5월 9일 에마누엘레 3세는 아들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였고, 6월 2일 [[1946년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개헌 투표]]를 통해 이탈리아는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움베르토 2세는 6월 12일 한 달 가량의 재위를 끝으로 폐위되었다. 공화국 출범이후 제헌의회는 새 대통령으로 [[엔리코 데 니콜라]]를 선출하였다.
 
== 이탈리아 공화국 (1946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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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경제는 붕괴되었고 사회적 분열도 극심하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스스로 퇴위하고 그의 아들 [[움베르토 2세]]가 즉위하였지만 군주제를 유지하려 할 경우 이탈리아는 내전을 맞을 처지였다. [[1946년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는 이탈리아의 정체로서 군주제를 유지할 것인지 공화정을 수립할 것인지를 묻는 투표였다. 6월 2일의 투표 결과 54%가 공화정을 지지하여 군주제는 종말을 맞았다. 새 공화국 정부는 왕족인 [[사보이 왕가]]의 모든 남성을 추방하였다. 왕가에 대한 추방 정책은 2002년까지 유지되었다. 국민투표는 556명의 [[이탈리아 개헌의회]] 의원의 선출도 겸하였으며, [[기독교민주당 (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이 207석, [[이탈리아 사회당 (1892년)|이탈리아 사회당]]이 115석, [[이탈리아 공산당]]이 104석을 차지하였다. 이탈리아 개헌의회는 1947년 미국의 압력으로 공산당이 불법화 된 가운데 [[이탈리아 의회]]로 대체되었다. [[1948년 이탈리아 총선]] 결과 기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였고, 이탈리아는 [[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참여하였다.<ref>Christopher Duggan, '' Force of Destiny: A History of Italy Since 1796'' (2008) ch 27</ref>
 
[[1947년 이탈리아 강화조약]]을 통해 이탈리아는 파쇼 정권이 점령하였던 발칸반도 지역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게 반환하였다. 이로서 이탈리아는 모든 해외 영토를 잃었다. 근대 이전부터 아드리아해 동안, 특히 달마티아에 살았던 이탈리아인들 가운데 다수는 이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로 [[달마티아 이탈리아인의 이주|이주]]하였다.
 
=== 경제기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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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와 60년대 사이 이탈리아의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하였다.<ref>Modern Italy 1871–1995 by Martin Clark</ref> 1951년에서 1963년 사이 이탈리아의 GDP는 연평균 5.6%의 성장을 보였고 1964년에서 1973년 사이에도 5.0%의 성장을 지속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 author=Nicholas Crafts, Gianni Toniolo| title = Economic growth in Europe since 1945| 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 year= 1996| page = 428| isbn = 0-521-49627-6}}</ref> 이러한 고성장은 먀샬 플랜이 가동중이던 독일과 일본에서도 비슷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ref>{{Cite서적 book인용| author=Ennio Di Nolfo| title = Power in Europe? II: Great Britain, France, Germany, and Italy, and the Origins of the EEC 1952–57| publisher=de Gruyter| year= 1992| location = Berlin| page = 198| isbn = 3-11-012158-1}}</ref>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였다.
 
이른바 [[이탈리아 경제기적]]이라 불리는 고성장으로 이탈리아는 급속한 인구 변동을 겪었다. 1955년에서 1971년사이 약 9백만명이 공업지역으로 이주하였다.<ref>{{Cite서적 book인용| author=Paul Ginsborg| title = A history of contemporary Italy| publisher=Palgrave Macmillan| year= 2003| location = New York| page = 219| isbn = 1-4039-6153-0}}</ref> 당시 산업 중심지는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였으며 "산업 삼각형"이라고 불렸다. 경제의 근대화로 새로운 인프라와 에너지 산업도 함께 증가하였다. 수백만 마일의 철도가 새로 놓이고 주요 도시가 고속도로로 연결되었다. 급속한 도시화와 인구 팽창으로 도시 개발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고성장은 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 성장으로 메스미디어가 발전하였고, 중산층은 경제적 여유를 드러낼 수 있는 [[소비주의|소비 문화]]를 즐겼다. 영화 산업도 크게 발전하여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디노 리시]], [[비토리오 데 시카]], [[에토레 스콜라]]와 같은 영화 감독들이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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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정당이 해체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가운데 실시된 [[1994년 이탈리아 총선]]의 결과 미디어를 장악한 자본가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포르차 이탈리아]]가 부상하였고, [[북부동맹 (이탈리아)|북부동맹]] 등과 연정을 통해 베를루스코니는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북부동맹이 연정 파기를 선언하자 베를루스코니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대통령은 재정 전문 [[기술관료제|기술관료]]였던 [[람베르토 디니]]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디니는 1996년 총선까지 총리직을 역임하였다.
 
[[1996년 이탈리아 총선]] 결과 중도 좌파 연합을 이끌던 [[로마노 프로디]]가 총리가 되었고, [[1998년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옛 공산당 출신인 [[좌익민주당 (이탈리아)|좌익민주당]] [[마시모 달레마]]가 총리가 되었으나 2000년 연정이 붕괴되자 사임하였다. 그후 [[2001년 이탈리아 총선]]을 통해 베를루스코니가 재집권하여 2006년까지 전쟁 이후 가장 오래 총리직을 역임하는 장기 집권에 성공하였다. [[2006년 이탈리아 총선]] 결과 베를루스코니가 패배하고 프로디 내각이 다시 수립되었다. 2006년 프로디 내각은 11개에 달하는 모든 중도 좌파 정당이 참여한 [[이탈리아 연합]]으로 연정을 이루었다. [[2008년 이탈리아 총선|2008년]] 베를루스코니는 극우 성향의 [[국민동맹 (이탈리아)|국민동맹]]과 포르차 이탈리아가 합당하여 창당한 [[자유의 인민]] 대표로 총선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2010년 국민동맹 측이 탈당한 뒤 자유의 인민은 세를 잃기 시작하였고, 베를루스코니 스스로도 성추문에 휩싸여 전국적인 반대 시위에 직면하였다. 2011년 11월 16일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반대 시위가 열리는 가운데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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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
* {{cite book서적 인용|first=John Rigby |last=Hale |authorlink=John Rigby Hale |year=1981 |title=A concise encyclopaedia of the Italian Renaissance |publisher=Thames & Hudson |location=London |oclc=636355191}}.
* Kohl, Benjamin G. and Allison Andrews Smith, eds. ''Major Problems in the History of the Italian Renaissance'' (1995).
* Najemy, John M. ''Italy in the Age of the Renaissance: 1300–1550'' (The Short Oxford History of Italy) (2005) [http://www.amazon.com/dp/0198700407 excerpt and text 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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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rk, Martin. ''The Italian Risorgimento'' (Routledge, 2014)
* Collier, Martin, ''Italian Unification, 1820–71'' (Heinemann, 2003); textbook, 156 pages
* {{cite book서적 인용| title = Italy in the nineteenth century: 1796–1900 | editor-last = Davis | editor-first = John A. | year = 2000 | publisher = Oxford University Press | location = London | url = http://www.questia.com/PM.qst?a=o&d=115250399 }}
* Farmer, Alan. "How was Italy Unified?, ''History Review'' 54, March 2006
* Hearder, Harry. ''Italy in the Age of the Risorgimento 1790 – 1870'' (1983) [https://www.amazon.com/Italy-Age-Risorgimento-1790-Longman/dp/0582491460 excer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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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all, Lucy. ''The Italian Risorgimento: State, Society, and National Unification'' (Routledge, 1994) [https://www.questia.com/library/103783059/the-italian-risorgimento-state-society-and-national online]
* Riall, Lucy. ''Garibaldi: Invention of a hero'' (Yale UP, 2008).
* {{cite journal저널 인용| last1 = Riall | first1 = Lucy | year = 1998 | title = Hero, saint or revolutionary? Nineteenth-century politics and the cult of Garibaldi | url = | journal = Modern Italy | volume = 3 | issue = 02| pages = 191–204 | doi=10.1080/13532949808454803}}
* Ridley, Jasper. ''Garibaldi'' (1974), a standard biography.
* Smith, Denis Mack. ''Cavour'' (1985)
* Smith, Denis Mack. ''Victor Emanuel, Cavour, and the Risorgimento'' (Oxford UP, 1971)
* Stiles, A. ''The Unification of Italy 1815–70'' (2nd edition, 2001)
* {{cite서적 book인용|author=Thayer, William Roscoe |title=The Life and Times of Cavour vol 1|url=https://books.google.com/books?id=zfwNAQAAMAAJ |year=1911}} old interpretations but useful on details; vol 1 goes to 1859]; [https://books.google.com/books?id=sK_CnX3-ZMQC volume 2 online covers 1859–62]
 
=== 현대 ===
* {{cite서적 book인용|last=Bosworth |first=Richard J. B. |title=Mussolini's Italy |year=2005 |ref=harv}}
* Cannistraro, Philip V. ed. ''Historical Dictionary of Fascist Italy'' (1982)
* Clark, Martin. ''Modern Italy: 1871–1982'' (1984, 3rd ed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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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yttelton, Adrian. ''Liberal and Fascist Italy: 1900–1945'' (Short Oxford History of Italy) (2002) [http://www.amazon.com/dp/0198731981 excerpt and text search]
* McCarthy, Patrick ed. ''Italy since 1945'' (2000)
* {{cite서적 book인용|last=Smith |first=D. Mack |title=Modern Italy: A Political History |year=1997 |url=http://www.questia.com/read/7696309?title=Italy%3a%20A%20Modern%20History |publisher=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location=Ann Arbor |isbn=0-472-10895-6 |ref=harv}}
* Toniolo, Gianni. ''An Economic History of Liberal Italy, 1850–1918'' (1990)
* Toniolo, Gianni, ed. ''The Oxford Handbook of the Italian Economy since Unific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785 pp. [https://www.h-net.org/reviews/showrev.php?id=43490 online review]; [http://eh.net/?s=Toniolo another online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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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개요 ===
* {{cite journal저널 인용| last1 = Azzi | first1 = Stephen Corrado | year = 1993 | title = The Historiography of Fascist Foreign Policy | journal = Historical Journal | volume = 36 | issue = 1| pages = 187–203 | jstor=2639522 | doi=10.1017/s0018246x00016174}}
* {{cite journal저널 인용| last1 = Bernhard | first1 = Patrick | year = 2014 | title = Renarrating Italian Fascism: New Directions in the Historiography of a European Dictatorship | url = | journal =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 volume = 23 | issue = 1| pages = 151–163 | doi=10.1017/s0960777313000556}}
* Boardman, Jonathan. ''Umbria: A Cultural History'' (Signal Books; 2012). Charts a complex history of literature, religion, art, migration, and industry.
* {{cite journal저널 인용| last1 = Dipper | first1 = Christof | year = 2015 | title = Italian Contemporary Historiography. A Snapshot | url = | journal = Vierteljahrshefte Fur Zeitgeschichte | volume = 63 | issue = 3| page = 351 | doi=10.1515/vfzg-2015-0021}}
* {{cite journal저널 인용| last1 = Ferrari | first1 = Paolo | year = 2015 | title = The memory and historiography of the First World War in Italy | url = | journal = Comillas Journal of International Relations | volume = 2 | issue = | pages = 117–126 }}
* Foot, John. ''Italy's Divided Memory'' (Palgrave Macmillan; 262 pages; 2010). Describes regional, political, and other divisions in Italian public memory of history.
* {{cite journal저널 인용| last1 = Musi | first1 = Aurelio | year = 2013 | title = Modern Italy in French, English and American historiography | url = | journal = Nuova Rivista Storica | volume = 97 | issue = 3| pages = 909–952 }}
* Pasquino, Gianfranco. "Political History in Italy," ''Journal of Policy History'' (2009) 21#3 pp 282–97, on 20th century historians; covers Italian politics after World War II, and works of Silvio Lanaro, Aurelio Lepre, and Nicola Tranfaglia. Also discusses rise of the Italian Communist party, the role of the Christian Democrats in Italian society, and the development of the Italian parliamentary Republic. [https://muse.jhu.edu/article/315859/summary summary]
* {{cite저널 journal인용|last=Ramm |first=Agatha |title=The Risorgimento in Sicily: Recent Literature |journal=English Historical Review |date=1972 |volume=87 |issue=345 |pages=795–811 |doi=10.1093/ehr/lxxxvii.cccxlv.795|jstor=562204 }}
* Rao, Anna Maria. "Napoleonic Italy: Old and New Trends in Historiography." in Ute Planert, ed., ''Napoleon’s Empire'' (Palgrave Macmillan UK, 2016). pp 8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