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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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와 도시와의 관계 ===
성경에는 예수의 무덤이 도시의 성벽 바깥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ref>for example, {{웹 인용|제목=Hebrews 13:12|url=http://bibref.hebtools.com/?book=%20Hebrews&verse=13:12&src=}}</ref>, 성묘거룩한 교회는무덤 성당은 1538년에 [[쉴레이만 1세|장대한 쉴레이만]] 술탄에 의해 건설된 [[옛 도시 (예루살렘)|옛 도시 성곽]] 안에 적절히 자리 잡은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의 심장부가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출처|날짜=2010-11-04}} 예수가 수난 받을 때에 그 도시는 수난 현장이 성벽 밖에 있을 만큼 매우 좁았다고 주장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아그리파 1세|헤로데 아그리파]](41~44년)는 도시를 북쪽으로 확장했으며, 필수적이었던 서쪽 성벽이 복원된 것은 전통에 의하면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고 전해진다.
[[파일:BasicJerusalemCrossSection.PNG|thumb|left|만일 서쪽 도시의 성벽이 처음부터 주님의거룩한 무덤 성당의 동쪽에 있었다면, 성벽이 둘러진 서쪽 언덕에서 적군과 교전할 때 아군이 우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벽은 그 바깥에 있는 방어 수로를 확장 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무덤 유적지는 [[성전 산]]의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도시를 보호하는 성벽이 너무 얇으면 안 되었고 성벽이 바로 유적지와 바로 근접하게 건축되어도 안 되었다. 성벽 밖의 전통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방어하는데 유리한 서쪽 성벽이 포함되어 그 성벽보다 더 중요한 [[트리포에온 계곡]]의 저지대에서 적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서 내리막을 향해 적군을 공격할 수 있게끔 언덕에 성벽이 건축되지는 않았다. 19세기 후반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의 조사관을 포함한 몇명의 학자들도 그 벽이 계곡에서 도시로 진격하려는 적들을 저지하기 위해 건축된 것 같지 않다고 했다.<ref>Colonel [[:en:Claude R. Conder|Claude R. Conder]], ''The City of Jerusalem'' (1909), (republished 2004); for details about Conder himself, see [[:en:Herbert Kitchener, 1st Earl Kitchener#Survey of Western Palestine|Herbert Kitchener, 1st Earl Kitchener#Survey of Western Palestine]]</ref> 그 전 도시의 성벽이 그 곳에 있어야 했던 아무런 고고학적인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지대 바로 남쪽과 예수의 무덤의 동쪽은 채석장이며<ref>See Discoveries at Archaeological excavations at [[:en:Meleke|Meleke]].</ref>, 속죄자의 루터교에 의한 발굴로 그 도시의 바깥에서 1세기 초반 동안의 교차로가 발견되었다. 채석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성벽을 쳐서, 도로는 수로 또는 도랑을 방어할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건설되었다. 그 곳과 관련있는관련 있는 채석장과 무덤은 주요 도시 서쪽에 있지 않고, 제2차 방벽으로 에워싸인 티로포에온 계곡의 서쪽 상업 지구에도 있지 않으며, 북쪽에 있다.
 
[[2007년]]에 단 바하트가 주님의거룩한 무덤 성당 영역 안에서 ''1세기의 여섯 묘소들을 발굴''했다. 그러한 즉슨, 도시 바깥(에 있는) 그 장소는 의심할 여지 없이, ....<ref name="ZDF">[[:en:Dan Bahat|Dan Bahat]] [http://www.zdf.de/ZDFde/inhalt/17/0,1872,5262833,00.html in German television ZDF, April 11, 2007]</ref>, 1세기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던 [[쿠크]] 양식이 기반인 무덤의 연대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의 ''쿠크'' 양식은 기원전 2~3세기에도 흔히 사용되었다<ref>Rachel Hachlili, (2005) ''Jewish Funerary Customs, Practices and Rites in the Second Temple Period''</ref>.
 
도시의 서부에 있는 1세기의 유적으로 가능성 있는 묘지는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미슈나]]에서 인용되는 1세기 후반에 랍비 지도자 [[아키바 벤 요셉]]의 기록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바람은 대개 서쪽에서 불어오므로 성전 산 전체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을 막고 사람들이 ''불결''해 하지 않으려면 서쪽에 묘지를 두면 안 된다고 하였다<ref name="Baba Batra">''[[:en:Baba Batra|Baba Batra]]'' 25a</ref>. 추가적으로, 이디큘은 도시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지만 도시의 서쪽 방벽은 이디큘에서는 동쪽에 있다. 여전히, 아키바는 유대법을 따라 도시와 50큐빗 거리 안으로는 무덤을 두지 않는데 주의를 기울였다<ref name="Baba Batra" />. 고고학적인 기록에서는 아키바의 지시에 따라 엄격히 고수된 위치에 묘터를 정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대부분의 고대 무덤들은 서쪽으로 도시의 동쪽, [[올리브 산]]에 있으며, 도시에서 1킬로미터가 넘는 곳과 성묘 교회는 예외이다<ref>Ephraim Stern, (editor),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1993</ref>.
 
그러나, 한 기록에서는, 아마도 서력기원 29년~135년 사이에 원래는 유대-기독교 시나고그로 건축되었고 [[성전 산]]을 향해 기원을 두고 있지만 예수 무덤의 유적지로는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은 건물에 있는 토라흐의 두루마리를 보관하기 위한 니치로 추정되는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ref>http://www.centuryone.org/apostles.html</ref> 그리고 성묘는거룩한 무덤은 여러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관련되는관련된 유적지가 있는 성전을 관계 짓는 종교의 전통에 따라 많은 부분이 일찍이 기독교 성전으로성당으로 변화하기 시작 했으므로시작했으므로 그 곳(예를 들어 아담의 묘지, 세상의 중심 등)에 교회를성당을 건설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 가능성 있는 또 다른 유적지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