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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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반트하우스' 는 독일어로 직물회관이라는 뜻으로, 18세기 중반부터 부유한 직물 상인들이 유능한 연주가들을 초빙해 소규모 공연을 하면서 정규 관현악단의 창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1781년에는 첫 번째 게반트하우스가 준공되었고, 이 곳을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이 동시에 창단되었다. 초대 카펠마이스터(음악 감독)로는 요한 아담 힐러가 선출되었으며, 이후 슈흐트와 슐츠, 폴렌츠 등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1835년에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었고, 연주와 지휘를 겸하던 전임자들과 달리 지휘만을 전담하는 최신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멘델스존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이나9번》이나 [[바흐]]의 [[마태 수난곡 (바흐)|마태 수난곡]] 등을 사후 초연 또는 부활 공연하여 음악사에 크게 기여했으며, 자신의 자작곡들도 이 악단을 지휘해 선보였다. 멘델스존 사후에는 리츠와 라이네케가 뒤를 이었고, 1884년에는 새로 신축된 게반트하우스로 상주 공연장을 옮겼다. 라이네케는 악단 최장 기록인 35년 동안 재임하면서 자작곡 외에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최초로 전곡 공연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라이네케의 후임으로는 [[아르투르 니키슈]]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취임과 동시에 임명되었고, 두 악단 모두 세계적인 악단으로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니키슈가 1922년에 타계한 뒤에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니키슈와 마찬가지로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를 겸무하는 형식으로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두 악단 외에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기 지휘자 겸직으로 인한 과중한 업무와 악단 경영진과의 대립 등으로 1928년에 물러났고, 후임으로 [[브루노 발터]]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태계였던 발터는 나치스 집권 후 강제로 사임당했으며, 후임으로 [[쾰른]]에서 옮겨온 [[헤르만 아벤트로트]]가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