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애니메이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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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시모카와 오텐]], [[고치 준이치]],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삼인방은 영화사들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아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하고 분석, 기법을 연구한 뒤 1916년부터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1917년]] 1월 [[시모카와 오텐]]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인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 이야기]]》를 제작하였는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230962</ref> [[칠판]]에 [[분필]]로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조악하고 단순하였지만, 훗날 시모카와는 기초적인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ref>장면마다 배경을 인쇄해둔 다음, 그 위에 캐릭터를 그려 서로 겹치는 부분은 흰색으로 칠해 한장면씩 그리는 방식이었다고 전해진다.</ref>을 개발하게 되었다. 기타야마 세이타로는 1917년 5월 《[[원숭이와 게의 전투]]》를, 고치 준이치도 6월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를 제작하였다. 이 세 작품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들로 항상 언급된다.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경우 일본에서 최초의 [[애니메이션]] 독립 스튜디오인 기타야마 영화 제작소를 설립하기까지 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설비가 파괴되면서 제작을 중단한다.
 
[[관동대지진]] 이후직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공백기를 맞았지만, 위기를 딛고 발전을 계속하였다. 기타야마 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 기술자 출신이었던 [[야마모토 사나에]]는 1925년 야마모토 만화제작소를 설립, 《노인을 버리는 산》을 시작으로 정부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하였고, 요코하마 시네마 상회 출신의 [[무라타 야스지]]는 1926년 첫 작품 《기린의 목은 왜 긴가》 이후 '무타라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컷 아웃 방식의 교육용 애니메이션들을 제작, 전쟁 전 최다 작품을 만들어내 달인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오후지 노후로]]는 1929년 일본 최초의 발성 애니메이션 《검은 고양이》를 제작하였으며, [[마사오카 겐조]]는 1932년 [[셀]] 방식을 이용해 제작된 본격적인 발성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자세상]]》으로 기술을 한층 진보시켰다진보시켰으며, 수년 뒤 《[[거미와 튤립]]》을 제작해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와중에 1927년 단편 《[[증기선 윌리]]》를 시작으로 하는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비롯한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1930년부터 일본에 연이어 수입된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 애니업계는 수입 작품에 비해 비싼 제작비, 엉성한 움직임과 스토리 등으로 경쟁력이 낮았고, 각 영화사들은 흥행 실패를 예감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손을 떼었다. 극장에서 물러난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정부 주관의 교육·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 사회는 군부독재 시절로 서서히 접어들며 1931년 [[중일 전쟁]] 반발, 1933년 일본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이르렀고, 정부는 이에 맞춰 전의를 고조시키기 위한 선전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여럿 의뢰 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세오 미쓰요]]의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 《[[모모타로·바다의 신병]]》, 오후지 노부로의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 야마모토 사나에의 《스파이 격멸》 등이 있었다. 이들 작품은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하는 등 군국주의 색채가 짙었지만,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연합군 [[점령군 총사령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려 했으며, 《[[모모타로·바다의 신병]]》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은 전후 애니메이터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ref>대표적으로 일본 만화의 거장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에서 해당 작품을 보고는 '일본에서도 이러한 작품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동받아 애니메이션 제작을 결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f>
 
=== 전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