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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문희현의 사람으로 3정(三征)의 한 명이다. 고양향후의 작위를 지녔던 [[관구흥]](毌丘興)의 아들로, 관구흥 사후 그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평원후문학 벼슬을 지냈다. 형주(荊州), 유주(幽州), 예주(豫州) 등 각지의 지방관직을 역임한다. 그는 연나라와의 전쟁 이전에 오환의 선우인 [[구루돈]](寇婁敦) 등과 교섭하여 국교를 맺는 성과를 거둔다. 물론 외형상으로는 구루돈이 [[위 (삼국)|위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각국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의전이었다.
 
=== 공손연의 난 ===
[[공손연]](公孫淵) 토벌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형주자사에서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전임되었고, [[237년]]에는 [[조예]]의 지시에 따라 [[오환족]]과 [[선비족]]을 거느리고 공손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공손연의 저항으로 [[요하]]를 넘지 못한 채 요수(遼隧)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고, 장마철이 되어 요하가 범람하자 요동에서 물러나 우북평으로 철수하였다.
 
관구검이 격퇴당한 뒤 공손연이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한(紹漢)이라는 연호까지 제정하면서 독립 의지를 천명하자,([[공손연의 난]]) [[238년]]에 위나라는 공손연 정벌을 위해 4만의 대군과 함께 사마의를 급파하였다. 사마의는 요동으로 진군하면서 우북평으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던 관구검의 군대를 휘하에 편입하고, 성공적으로 공손연을 정벌하여 [[선비족]]<ref>《십육국춘추》 전연록 모용외 "曾祖莫護跋 魏初率其諸部入居遼西 從司馬宣王討公孫淵有功"</ref> 과 [[고구려]]<ref>《삼국지》 열전 고구려 "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ref> 와 함께 요동의 공손씨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 공으로 관구검은 안읍후로 승진하였다.
 
=== 고구려 원정 ===
[[242년]]에 [[고구려]]가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자 이에 [[오환족]]<ref>《관구검기공비》 "討寇將軍 巍烏丸單于"</ref> 과 [[선비족]]<ref>《십육국춘추》 전연록 모용외 "祖木延 左賢王 從毋丘儉征高麗有功"</ref> 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관구검은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을 맞아 처음에는 비류수와 양맥곡에서 각기 3천 군사가 참획되는 등 고전했지만, 이후 고구려군 2만 가운데 1만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수도 [[환도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자, 동천왕은 [[옥저]]로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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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은 현도 태수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하고 왕기는 다시 따로 군사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하였으나, 고구려 장수 유유와 밀우의 활약으로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의 추격에서 벗어나 관구검이 철수한 뒤 환도성으로 돌아왔다.<ref>관구검의 1차, 2차 공격 시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삼국지》 위서 제왕방기(齊王芳紀)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을 정시 7년(246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에는 정시 5년(244년)에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과 《관구검기공비》에는 정시 중에 1차 정벌하고, 정시 6년(245년)에 2차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양서》 고구려전에는 정시 5년(244년)에 1차 정벌하고, 정시 6년(245년)에 2차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ref>
 
=== 오의 침공 방어 ===
관구검이 위나라로 돌아 온 후, 진동도독으로 임명되어 양주에 와서, [[오 (삼국)|오]]의 [[제갈각]](諸葛恪)<ref>[[자 (이름)|자]]는 원손(元遜), [[오 (삼국)|오나라]]의 재상 [[제갈근]](諸葛瑾)의 장남.</ref> 의 침공을 막았다. [[255년]] 관구검은 [[사마사]](司馬師)의 전횡에 분노, [[문흠]](文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문흠]]이 [[사마사]]에게 지면서, 관구검은 야반도주하여 탈출하는 길을 선택했고 자연히 그가 거느린 말갈족을 비롯한 군대 군세가 약화되었다. 도주 중에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백성인 [[장속]](張屬)의 활에 맞아 죽었고 장속은 그 목을 경도(京都:수도)인 낙양으로 보내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관구검이 위나라로 돌아 온 후, 진동도독으로 임명되어 양주에 와서, [[오 (삼국)|오]]의 [[제갈각]](諸葛恪)<ref>[[자 (이름)|자]]는 원손(元遜), [[오 (삼국)|오나라]]의 재상 [[제갈근]](諸葛瑾)의 장남.</ref> 의 침공을 막았다.
 
=== 관구검·문흠의 난 ===
관구검이 위나라로 돌아 온 후, 진동도독으로 임명되어 양주에 와서, [[오 (삼국)|오]]의 [[제갈각]](諸葛恪)<ref>[[자 (이름)|자]]는 원손(元遜), [[오 (삼국)|오나라]]의 재상 [[제갈근]](諸葛瑾)의 장남.</ref> 의 침공을 막았다. [[255년]] 관구검은 [[사마사]](司馬師)의 전횡에 분노, [[문흠]](文欽)과 함께 군사를[[관구검·문흠의 난|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문흠]]이 [[사마사]]에게 지면서, 관구검은 야반도주하여 탈출하는 길을 선택했고 자연히 그가 거느린 말갈족을 비롯한 군대 군세가 약화되었다. 도주 중에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백성인 [[장속]](張屬)의 활에 맞아 죽었고 장속은 그 목을 경도(京都:수도)인 낙양으로 보내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이후 장남인 [[관구전]](毌丘甸)은 반(反)사마씨 봉기를 일으켰다가 주살당했고, 차남인 [[관구종]]과 그의 아들이자 관구검의 손자인 [[관구오]]는 후에 서진(西晉) 시대가 되고 나서 출사했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순양궁(純陽宮)에 있는 '관구씨조상비'(毋丘氏造像碑)는 관구검의 손자 관구오(毋丘奧)가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