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1세 (오세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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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년]] [[로타르 1세]]는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과 협상할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콘라트를 파견하였다. 콘라트 외에도 [[로타르 1세]]가 파견한 사절단 중에는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가신이자 로타르 1세의 왕비 [[투르의 이르멘가르트]]의 삼촌 아달하르트, 백작 코보(Cobbo) 등이 있었다. 그의 일가는 프랑크 왕국이 분할될 때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의 편에 섰고, 독일인 루트비히의 고문이 되었다.
 
[[844년]] 독일인 루트비히로부터 린츠가우 백작에 임명되었다임명되었고, [[콘스탄스 호수]] 주변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849년 대머리 카를이 그를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주요 자문관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858년]]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콘라트와 그의 아내 [[투르의 아델하이트]] 및 아들 위그와 [[콘라트 2세 (하부르군트)|콘라트 2세]], 콘라트의 형 [[상스의 루돌프]]의 아들 콘라트 등은 주군인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를 버리고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에게로 갔다.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은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아들이었다.
 
대머리 카를은 그들에게 관대한 혜택을 주었고, 대머리 카를은 콘라트에게 많은 지역의 백작직에 임명하였다. 858년에 그는 아르가우,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고 오세르의 생제르맹 대수도원과 생 갈 수도원의 원장직에 임명되었다. 한편 [[독일]]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는 859년 [[바이에른]]과 [[알레만니아]]에 있던 콘라트의 영지와 재산을 모두 압수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