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1세 (오세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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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858년]]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콘라트와 그의 아내 [[투르의 아델하이트]] 및 아들 위그와 [[콘라트 2세 (하부르군트)|콘라트 2세]], 콘라트의 형 [[상스의 루돌프]]의 아들 콘라트 등은 주군인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를 버리고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에게로 갔다.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은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아들이었다.
 
대머리 카를은 그들에게 관대한 혜택을 주었고, 대머리 카를은 콘라트에게 많은 지역의 백작직에 임명하였다. 858년에 그는 아르가우,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고, 오세르 백작 및 오세르의 생제르맹 대수도원과 생 갈 수도원의 원장직에 임명되었다. 그가 오세르 백작에 임명된 것은 후일 그의 후손들이 [[프랑크 왕국]]의 혼란기 때 [[부르고뉴]]에서 자립하게 된 밑천이 되었다. 한편 [[독일]]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는 859년 [[바이에른]]과 [[알레만니아]]에 있던 콘라트의 영지와 재산을 모두 압수해버린다.
 
[[860년]] [[6월]]에 콘라트는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과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가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를 만나는 것을 목격하였다.<ref>[http://www.dmgh.de/de/fs1/object/goToPage/bsb00000876.html?pageNo=469&sortIndex=020%3A010%3A0001%3A010%3A00%3A00&zoom=0.50#ES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Legum tomus I , Adnuntiatio domni Karoli, Pag 469]</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