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1세 (오세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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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년]]부터 [[862년]]/[[864년]] 무렵까지 [[아르가우]], [[오세르]]의 [[백작]]이며 [[콘스탄스 호수]] 주변 지역의 영주였다. 또한 [[파리 (프랑스)|파리]]의 영주였으며 [[오세르의 생 제르맹 대수도원]]장이었다. 그는 9세기 중반 [[프랑크 왕국]]의 혼란기에 하부르고뉴에서 자립한 루돌프 가문의 선조이기도 하다. 별칭은 콘라트 1세 노인공(Conrad I the Elder)이다.
 
== 생애 ==
=== 가계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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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년에서 834년 무렵 [[바이에른의 유디트]]가 폐위당하고 수도원에 감금당할 때 그도 감금당했지만, 그의 일가는 상부[[슈바벤]] 지역에서 강력한 지위를 얻게 된다. 834년 경건왕 루트비히가 [[로타르 1세]]를 물리치고 기적적으로 복귀하면서 [[바이에른의 유디트]]도 [[토르토나]]에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몇년 간 그는 [[파리]] [[백작]]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했다. 839년부터 849년까지는 [[아르가우]]의 그라프로 재직했다. 839년 알프가우 백작이 되었다.
 
[[842년]] [[로타르 1세]]는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과 협상할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콘라트를 파견하였다. 콘라트 외에도 [[로타르 1세]]가 파견한 사절단 중에는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가신이자 로타르 1세의 왕비 [[투르의 이르멘가르트]]의 삼촌 아달하르트, 백작 코보(Cobbo) 등이 있었다. 그의 일가는 프랑크 왕국이 분할될 때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의 편에 섰고, 독일인 루트비히의 고문이 되었다.
 
=== 베르덩 조약 이후 ===
[[844년]] 독일인 루트비히로부터 린츠가우 백작에 임명되었고, [[콘스탄스 호수]] 주변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849년 대머리 카를이 그를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주요 자문관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858년]]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콘라트와 그의 아내 [[투르의 아델하이트]] 및 아들 위그와 [[콘라트 2세 (하부르군트)|콘라트 2세]], 콘라트의 형 [[상스의 루돌프]]의 아들 콘라트 등은 주군인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를 버리고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에게로 갔다.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은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아들이었다.
 
대머리 카를은 그들에게 관대한 혜택을 주었고, 대머리 카를은 콘라트에게 많은 지역의 백작직에 임명하였다. 858년에 그는 아르가우,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고, 오세르 백작 및 오세르의 생제르맹 대수도원과 생 갈 수도원의 원장직에 임명되었다. 그가 오세르 백작에 임명된 것은 후일 그의 후손들이 [[프랑크 왕국]]의 혼란기 때 [[부르고뉴]]에서 자립하게 된 밑천이 되었다. 한편 [[독일]]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는 859년 [[바이에른]]과 [[알레만니아]]에 있던 콘라트의 영지와 재산을 모두 압수해버린다.
 
[[860년]] [[6월]]에 콘라트는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과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가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를 만나는 것을 목격하였다.<ref>[http://www.dmgh.de/de/fs1/object/goToPage/bsb00000876.html?pageNo=469&sortIndex=020%3A010%3A0001%3A010%3A00%3A00&zoom=0.50#ES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Legum tomus I , Adnuntiatio domni Karoli, Pag 46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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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주석각주}}
 
== 관련 항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