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피어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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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의 장례가 어떻게 치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자연사박물관 직원 보아스는 에스키모인들의 유해를 병원으로 후송해 해부하였고 급기야는 자연사박물관에 에스키모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보아스는 '중앙 에스키모'란 논문을 출간(1888년), 미국 인류학계로부터 크게 인정받는다.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살다보니 전통적인 이누이트 생활방식을 잊어버려서 고향으로 돌아가도 살아갈돌아갈 없었던 미닉은 미국내에서미국에서 인종차별로 고생을 하면서 나무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자연사박물관을 관람하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해부되어 박제되어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알게 되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미닉은 피어리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냉대를 당하고 만다.
 
되려오히려 피어리는 박제 관련 수익을 나에게도 내놓으라고 자연사 박물관에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하는 추태까지 벌였다.
 
낯선 미국에서 나무꾼으로 연명하며 힘겹게 살아가던 미닉은 1918년 28살 젊은 나이에 질병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