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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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년 니콜로는 자신의 고향인 트레비소에서 14세의 나이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ref>Mortier, p. 320. Fietta, p. 226, with notes 1 and 2.</ref> 트레비소의 수도원장은 그를 베네치아의 산 조반니 에 파올로 수도원에 보냈다. 이후 7년 간 니콜로는 베네치아에서 기초 교육을 계속 받았다. 이 기간 말경에 가서 그는 트레비소 대성당의 참사회원을 형제로 둔 로메오 퀴리니의 어린 아들의 과외교사를 맡았다.<ref>Fietta, p. 226, n. 3; p. 228-229. 로메오 퀴리니의 자녀 중의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 퀴리니는 나중에 1304년 베네딕토 11세에 의해 트렌토의 주교가 되었다.</ref> 1262년 니콜로는 밀라노로 가서 6년 간 산 에우스토르지오 수도원 학교에서 수학하였다.<ref>Fietta, p. 229.</ref> 이후 그는 베네치아 수도원의 강사가 되어 수도원의 동료 수사들의 기초 교육을 담당하였다. 베르나르 기에 의하면, 그는 1268년에서 1282년까지 14년 동안 수도원 강사로 봉사했다. 니콜로는 1276년에 고향인 트레비소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강사로 초빙되어 1280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282년 2월, 니콜로는 다시 제노바로 거처를 옮겨 다시 강사를 지냈다. 그는 학사 학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교수를 지내지는 못했다.<ref>Mortier, 322-323. Fietta, p. 231-234.</ref>
 
1286년 브레시아에서 소집된 수도회 총회에서 니콜로 신부는 롬바르디아 관구장으로 선출되었다.<ref>Fietta, p. 236. Benedikt Maria Reichert (editor), ''Cronica ordinis praedicatorum ab anno 1170. usque ad 1333'' Part 1 (Rome 1897), pp. 102-104.</ref> 롬바르디아 관구장을 지내면서 니콜로 신부의 생활 방식은 크게 바뀌었다.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순시와 격려, 교정을 위해 여러 수도원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당시 롬바르디아에는 51곳의 수도원이 있었다.<ref>Mortier, p. 323. 하지만 베르나르 기는 1303년 롬바르디아에는 33곳의 수도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Jacobus Echard, ''Scriptores Ordinis Praedicatorum recensiti'' Tomus primus (Paris 1719), p. vii. 그 당시 니콜로는 남자 수도원 뿐만 아니라 여자 수도원(수녀원)도 관할하고 있었다.</ref> 또한 그는 이단심문관 역할도 수행했는데, 당시 교황들은 특히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이러한 책무를 수행하기에 적격이라고 여겼다.<ref>1289년 8월 26일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롬바르디아와 제노바의 모든 도미니코회 이단심문관들에게 힘을 내서 이단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라고 촉구하는 친서를 써서 보냈다. Augustus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no. 23053.</ref>
 
공증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1254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베네치아]]와 [[밀라노]]에서 수학한 후 학자와 저술가로 일하다가 원장, 관구장 등을 역임한 후 [[1296년]] 5월에 [[수도회]]의 총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