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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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관제 개혁과 복식 개혁, [[연좌제]] 등 악형 폐지 등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성균관]][[대사성]], [[이조]] [[참판]], [[승정원]][[좌승지]]를 거쳐 [[1883년]]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그해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내무부]] [[협판]],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도승지]]·협판내무부사를 지냈다.
 
[[1887년]](고종 24년) 다시 [[협판]][[내무부|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가 되었다가 그해 [[미국]] 특파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주재 [[청나라]]군 최고사령관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凯)의 압력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한성]]에 머무르며 출발을 연기하였으나 그해 연말에 [[청나라]]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제물포 항]]에 정박된 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건너갔다. [[미국]] [[워싱턴 D.C.]]에 부임하여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S. G. Cleveland)에게 신임장을 제정받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미국행은 조선인 최초의 외교관 파견이었다. 이때 그는 백악관 대통령 관저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하자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가 매우 당황해하여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에서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 아닌 동등한 외교국가로 인정하였다. 그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1889년]]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