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로마 가톨릭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신해 혁명]] 이후 [[1922년]] 교황청의 대표가 [[중화민국]] [[베이징 시]]에 부임했으며, [[1942년]]에 양국은 수교하였다. [[1946년]] 중국교구가 설립되면서 [[난징 시]]에 주중 교황 대사관({{llang|la|Nuntiatura Apostolica in Sinis}})이 설치되었다. 교황의 훈령은 중국 교회의 상황을 거의 혁명적인 방식으로 바꾸었다.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회는 중국인들에게 종교적으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가톨릭교회가 죽은 가족에게 제사를 바치며 예를 표하는 중국 현재의 유교적 관습을 미신행위로 보고 엄격하게 금지한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조상 제사는 옛날부터 내려온 미풍양속이었지만, 교황청에서 바라볼 때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우상숭배에 불과했다. 그 결과, 중국 내에서 가톨릭교회의 교세는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조상 제사 금지에 관한 교황청의 가르침은 20세기에 와서 바뀌게 되었다. [[교황 비오 12세]]가 1939년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통해 조상 제사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조상 제사에 대해 관용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교황청 포교성은 《이제는 분명히(Plane Compertum)라는 담화문을 통해, 중국인 신자들에게 조상 제사가 거행될 때 단순히 사회적 관습의 의미로만 거행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되지만, 만일 그 예절 속에 종교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가 있을 경우에는 소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당부하였다. 교황청이 이렇게 조상 제사를 부분적으로나마 허용한 배경에는 조상제사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 사회 문화적 풍속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타이완]]은 [[1514년]] 이래 사법 지역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포르투갈]]의 [[푼샬 교구]]에 속해 있었다. [[타이완]]은 전교 지역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톨릭교회의 조직적인 활동이 있었다. [[일본 제국]]의 [[타이완]] 점령 이후, [[1913년]] [[타이완]] 교회는 샤먼 교구로부터 독립하여 [[대목구]]가 세워졌으며, [[1949년]] 가오슝 교구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