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8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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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파일:Mustafa Kemal Atatürk and Edward VIII.jpg|thumb|left|300px|[[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터키 대통령과 에드워드 8세 ([[1936년]] [[9월 4일]])]]
[[1894년]] 당시 왕세손인 [[조지 5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 [[군대|군]]에 입대하여, 총사령관, 보병장 등을 거쳤다. [[1916년]] 예편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1919년]] 교사, 약제사, 육군교관, 연방행정관, [[라디오]] 뉴스 해설자, 국방행정관 등으로 일했으며 그 뒤에는 [[스탠리 볼드윈]]의 재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역임했고 [[헤럴드 맥밀런]], [[네빌 체임벌린]], [[오스틴 체임벌린]],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해럴드 월슨]], 스탠리 볼드윈 등과 사귀기도 하렸다하였다.
 
1926년 [[에든버러 대학]]총장을 거쳐 [[1932년]] 해군장관을 거쳐 [[1934년]] 병원 의사가 되었다. [[1936년]] 군주가 되었으나 사퇴하고 윈저 공작이 되었으며, [[월리스 심슨]]과 결혼했다. 그 당시 [[월리스 심슨]]과의 결혼은 기념비적인 세기의 로맨스였다. [[월리스 심슨]] 부인은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신분이였고신분이었고, 에드워드 8세는 왕위 계승순위 제1순위의 후계자였다. 왕위 계승이 확실시 되었던 에드워드 8세는 왕권에 대한 책임을 지는 대신 사랑을 선택하여 왕좌를 버렸다. 두 사람은 오랜 비밀 관계가 영국 국민과 정치인들에게 들통나자 프랑스로 거처를 옮겨 국제적 인사로 상류사회를 순회하며 살았다.
 
또한 그는 [[1937년]] 군수로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나치 관료들과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의 환영을 받았으나 [[윈스턴 처칠]]과 밀약을 맺고, 유화 정책을 비판하였다. 또한 [[영국]], [[프랑스]], [[뉴질랜드]], [[미국]]을 방문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4년]] 체코슬로비키아에서 회담을 나누고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 대통령을 사귀기도 했다. [[1953년]] 영국을 방문하여 [[테크의 메리|어머니]]의 장례식에 동생 [[영국의 조지 6세|조지 6세]]과 함께 참여했으며 [[프랭클린 루스벨트|루스벨트]]와도 밀약을 맺었다. 그 뒤 험프리 부통령, 존슨 대통령과 함께 [[베트남전쟁]]을 지지하고 [[닉슨]] 사임을 요구했는데 현관 제막식 때도 영국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