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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85년]]에 목후가 죽은 후 아저씨 [[상숙]]이 군위에 올라 달아났다가, 4년 후인 [[기원전 781년]]에 상숙을 치고 군위를 되찾았다.<ref name="sk39"/>
 
서주 말기, [[서주 유왕]] · [[포사 (주나라)|포사]] · [[괵]] 등 왕의 친위세력과 [[신 (번국)|신]], [[증]], [[여]], [[견융]] 등 폐태자 의구(후의 [[동주 평왕]])의 외가 신나라 측 세력의 태자위를 두고 벌인 경쟁에서, 비록 대립이 나타나기 전이지만 증나라를 공격한 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후는 당초에는 왕실 편인 것 같으나, 유왕이 봉화를 가지고 제후를 희롱했으므로 결국 문후도 유왕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다. 마침내 유왕이 폐태자 세력에게 져 살해당하고 폐태자 의구가 주평왕으로 즉위할 때, 문후는 [[위 무공]], [[정 무공]], [[진 양공 (영진)|진 양공]]과 함께 왕을 호위했다고 한다. 특히 이때 진나라는 [[정 (춘추 전국)|정나라]]와 함께 동천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두 나라로 꼽혔다.<ref name="r1">심재훈 : 《융생편종과 진강후 명문 및 그 역사적 의의》, 동양사학회, 동양사학연구, 제87집, 2004. 6. 1 ~ 36쪽</ref>
 
괵나라는 주평왕에 계속 반기를 들고 유왕의 또 다른 아들 왕자 여신을 [[동주 휴왕|주 휴왕]]으로 옹립하여 평왕 세력과 대립했으나, 문후는 계속 주평왕 편에 서서 평왕 측의 왕실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해, 마침내 평왕 21년, 즉 진문후 31년([[기원전 750년]])에 휴왕을 죽여 왕실의 내분에 종지부를 찍었다. 주평왕이 진문후를 위해 지은 《[[서경]]》 〈문후지명〉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ref nam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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