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와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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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가 바로 [[유화부인]]이다. 유화는 부모에게 버려져 그곳에 있었는데, [[금와]]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궁으로 맞아들였다. 유화가 햇빛을 받아 수태한 뒤에 알을 낳자 이상하게 여긴 금와는 알을 버리게 하였는데 짐승들이 알을 품어주고 짓밟지 않고 피해가는 등 기이한 일이 생기자 유화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후 태백산(太白山) 남쪽의 우발수(優渤水)에서 사냥을 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데려다가만나 유화(柳花)를 방에 가두었더니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잉태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뒤에 [[고구려]]의 시조가 된 [[추모왕]](鄒牟王)이 나왔다. 여기서 ‘추모’를 ‘주몽(朱蒙)’이라는 하는 것은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중국]]이 낮춰 부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71739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의 창씨개명"] 연합뉴스(2007.03.12) 기사 참조</ref><ref>고구려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서길수 박사는 발표문에서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의 중국식 표기일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글자를 빌려 써 추모를 비하했다고 지적했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5세기 중엽의 고구려 모두루무덤에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로 표기했지만 6세기 중엽 이후 편찬된 위서(魏書)ㆍ주서(周書)ㆍ북사(北史)ㆍ수서(隋書) 등에서는 주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것, 서 박사는 "'주(朱)'자는 '난쟁이(侏)'라는 뜻이 있고 '몽(蒙)'자는 '속이다'ㆍ'어리석다'는 뜻으로 고구려의 시조를 '어리석은 난쟁이'로 폄하한 작명(作名)"이라며 "일본의 창씨개명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ref>
 
추모가 장성하자 [[대소왕|대소]](帶素)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처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금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모에게 말을 기르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추모가 대소의 음모를 피해 도피하자 추격대를 파견하였으나 잡지는 못하였다.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인 [[기원전 24년]] 유화가 죽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얼마후 금와가 죽고 [[대소왕]]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