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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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바지}}
[[파일:Gama2 crop.jpg|thumb|137x137px|가마를 이는 남자들]]
바지는 한복에서 하의를 가리킨다. 꼭 여성이 입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으나 대개 남자 한복을 지칭하며 사실 한복이 아니더라도 [[청바지]] 등의 일반적인 의복을 가리킨다. 한복의 바지는 6세기까지 신분의 차이 없이 그냥 바지부리를 여맸으나 7세기부터는 여매는 것 대신 선으로 두르는 형태가 생겨난다.<ref>박선희, 《한국고대복식》,지식산업사, 2002년. 제2부 한국복식의 원형 부분 참조.</ref>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겹고, 단고 혹은 단순히 고로 표기하고 있다. 겹고라는 의미는 겹바지임을 가리킨다.<ref name="김은정">김은정, 〈남자 한복 바지의 구성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의류학회지》 144호(2005), 910-911쪽</ref>
 
바지는 복색, 재봉방법, 자수 등에 따라 홑바지, 가죽바지, 명주바지, 무명바지 등으로 이름을 구분한다.<ref>임영미, 《한국의 복식문화》, 경춘사, 1996년. 320쪽</ref> 한복 바지와 서구식 바지가 다른 점은 구성은 대칭하지만 앞뒤 중심이 사선이어서 움직일 때 편하고 또 한편으로는 착용자의 위엄과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는 데 있다. 따라서 치수가 분명히 정해져 움직임에 제한이 있게 되는 양장 바지와 달리 여유로운 한복 바지를 입으면 움직임에 상대적인 불편함을 덜 느끼게 되어 좌식 생활에 편했다.<ref name="김은정">김은정, 〈남자 한복 바지의 구성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의류학회지》 144호(2005), 917쪽</ref>
 
바지라는 용어는 "把持"(파지)라고 [[정인지]]가 기록한 것이 최초<ref>이어령, 《우리문화 박물지》, 디자인하우스, 2007년. 271쪽</ref> 이며 왕과 왕비의 바지는 특별히 '봉디'(봉지)라고 별도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ref>[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00058837 바지] E-museum-바지, 2011년 8월 12일 검색해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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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History-1910-1920-Korean.mother.child-Carpenter.Collection.jpg|left|thumb|180px|한복을 입은 모녀(1910~20년대로 추정)]]
 
1970년대 이후 한복은 그 기능이 예복으로 국한되면서 생활보다는 미적인 기준을 강조해 이를 계승하려는 노력과 함께 좀 더 창조적인 면모를 두드러지게 하도록 한복이 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더욱 원색적이고 라인을 살리는 형태<ref name="이경자">이경자, 《노리개》,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년. 19쪽</ref> 의 한복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을 전후로 해 여러 단체들의 한복 입기 운동 전개로 많은 관심을 얻었으며 한복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된다.<ref name="임경화">[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c8f2a0d0c6ad8f6d# 치마의 장식요소와 표현성에 관한 연구 : 조선시대부터 2001년까지] 임경화, 가톨릭대학교대학원 의류학전공 2002년, 104쪽, 114-116쪽</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3&aid=0000003363 긴조 9호세대 비사-굿판을 벌여라] 주간경향 2004-02-27</ref> 1996년 문화관광부가 시작한 "한복입는 날" 행사는 대중의 한복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ref>안병선, 《21세기 황금시장 문화산업》 매일경제신문사, 2000년, 115쪽</ref><ref>김병욱, 《재테크 창업 가이드》, 킴스정보연구소, 2004년, 32쪽</ref>
 
과거의 사극이 고급스럽고 화려한 면모를 지닌 한복을 선보였다면 현대 사극에서 나타나는 한복의 변화는 그 소재와 모양에 대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웨딩드레스]]에 쓰이던 레이스 소재를 한복에 사용하고 저고리를 생략해 어깨를 노출하면서 치마의 가슴띠에 수를 놓거나 끈으로 처리된 한복 드레스가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ref>[http://www.etnews.com/news/detail.html?id=201009160010 11번가 인기검색어] ETN 2010-09-17</ref> 한복이 드레스의 형태를 접목한다는 것은 치마의 가슴부분을 화려하게 만들어 저고리를 입지 않아도 치마 윗부분의 장식을 통해 선과 소재의 색상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9142126475&code=900305 한복, ‘정갈한 마음’을 입다] 경향신문 2010-09-14</ref><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129016012 전통·퓨전 한복 디자이너가 말하는 설빔 트렌드] 서울신문 2011-01-29</ref> 일례로 현대적인 감성에 궁중을 배경으로 하여 한복을 등장시킨 드라마 [[궁 (드라마)|궁]]에서는<ref>[http://kmomnews.hankyung.com/news/apps/news.sub_view?popup=0&nid=05&c1=05&c2=05&c3=00&nkey=201107181711161 한복이 덥다는 것은 편견, 시원하고 섹시한 여름한복 출시] 한경닷컴-키즈맘, 2011-07-18, 2011-08-03 검색해봄.</ref> 기장이 훨씬 짧은 형태의 한복이 미니드레스와 접목되었다. 서구 문화에서 나타나는 의복의 개념을 한복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은 꼭 사극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며 1980년대에 국제적인 행사를 주최하면서 화려함을 중시했던 것과 달리 1990년대부터는 치마와 섶에 자수를 하거나 박장식을 하던 유행이 사그라들었다. 대신 생활 한복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원피스]]처럼 한복을 변형하여 치마 길이는 짧게 했다.<ref name="임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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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신구가 존재했다. 한복의 장신구에는 가락지, 귀고리, 노리개, 비녀, 뒤꽂이, 단추 등이 있으며<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247&yy=2009 한복에 어울리는 장신구] 매일신문 2009-01-31</ref> 그 화려함이 진주와 산호에 이르기까지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고(最古)의 귀고리는 [[마한]] 시대(3세기 추정)의 것이며<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644505 마한 시대 무덤 발견…가장 오래된 '금귀고리'] SBS 2009-09-16</ref>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임진강|임진강변]]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군의 은팔찌, 유리구슬<ref>[http://www.ktv.go.kr/ktv_contents.jsp?cid=332500 임진강변, 고구려 귀족집단 고분군 유적 발견] KTV 2010-03-26</ref>, 백제의 금동관, 허리띠<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0091522 금동관, 허리띠등 `위세품` 한성백제의 세력분포 반영] 문화일보 2004-12-14</ref> 신라 고분군의 귀고리와 금제 장식<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067205 ‘눈부신 황금의 나라’ 신라 금장신구展] 2001-07-30</ref> 등이 있다. 이후 고려 시대 때에도 귀금속을 사용한 장신구가 발달<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08/2011060802650.html 기메 박물관의 고려장신구] 조선일보 2011-06-08</ref> 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종류도 팔찌와 옥으로 만든 단추형 장신구, 목걸이, 장식편 등으로 화려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806063 우리문화재 약 4백점, 되돌아와] 연합뉴스 1994-09-22</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767836 고려인의 숨결 오롯이…금동보살좌상 최초 공개] SBS 2010-07-08</ref>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의 귀족계급 사녀들은 허리띠에 금방울, 금 향낭을 패용했다."고 쓰여 있다.<ref>[http://www.ccdailynews.com/section/?knum=153357 금 값] 충청일보 2010-06-03</ref>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장신구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17세기를 넘어가면서<ref>[http://www.segye.com/Articles/SPN/ENTERTAINMENTS/Article.asp?aid=20110216004183&subctg1=&subctg2= 조선시대 남자들이 귀고리를 한 까닭은?] 세계일보 2011-02-16</ref> 장신구의 사용이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게 된다.<ref name="이경자">이경자, 《노리개》, 2005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2-13쪽</ref>
 
=== 머리장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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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두리 ====
족두리는 특별한 의식 때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관(冠)의 일종으로서 다른 이름은 족아·족관이다. 보통은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6각형의 형태를 띠며 가운데 솜이 들어 있고 가운데를 비워서 얹어놓고 비녀를 질러 고정한다.<ref>[http://ehistory.korea.kr/pop/photo_pop2.jsp?photo_PhotoSrcGBN=FP&photo_PhotoID=0&detl_PhotoDTL=258 족두리] 한국역사정보 2011-07-31 검색해봄.</ref> 족두리는 원래 [[몽골]] 여자들이 쓰는 모자 장식의 일종으로 [[원나라]]의 공주들이 [[고려]]로 오면서 착용해 유행하기 시작했다. 족두리에도 무엇을 써서 장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외향이 변형되고 달라져서 화관으로 불리기도 했다.<ref name="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4》, 한길사, 2001년, 67쪽</ref>
 
족두리가 더 보편화된 것은 조선 중기로서 다리머리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면서 부터다. 다리머리란 다리를 덧드려 머리에 가체와 같은 장신구를 얹는 것으로 머리장식이다. 하지만 일부 가정에서는 딸의 혼사를 위해 전 재산을 팔아 다리머리를 준비하는 등 폐단이 극심해졌다. 이에 따라 족두리를 대용해서 착용하게 했으나 족두리에도 많은 비용을 투자하기란 매한가지여서 문제는 상당 부분 지속되었다.<ref>[http://www.cybernk.net/infoText/InfoFolkDetail.aspx?mc=FF0202&sc=C21819101&tid=C200052261 머리꾸밈새] 평화연구소 2011-08-01 검색해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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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리개 ===
[[파일:Samjak Norigae.jpg|thumb|right|140px|삼작노리개]]
가장 흔히 알려진 한복의 장신구는 노리개로서 노리개는 한복 저고리의 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여성 장신구의 일종<ref>[http://stdweb2.korean.go.kr/search/List_dic.jsp 노리개] 국립국어원 검색결과 2011-07-31 검색해봄.</ref> 이다. 그 속뜻은 "소중한 물건", "사랑하고 즐기며 아끼는 물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ref name="이경자">이경자, 《노리개》, 2005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2-13쪽</ref> 노리개는 신분에 관계 없이 거의 대부분의 여자들이 착용했으며 신라 시대와 고려 왕조 동안에는 허리띠 쪽에 찼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저고리 아래 부분으로 그 위치가 올라오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ref>[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117103 노리개] e-museum 2011-07-31 검색해봄.</ref>
 
노리개는 고유 의상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어 단조로울 수 있는 의복을 치장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 색조는 홍·남·황 삼원색을 비롯해 자주, 보라, 옥색 등 열두 색에 이를 정도로 다양했으며 왕실에서부터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노리개를 착용했다<ref>김지영, 《규방공예》, 2000년, 컬처라인, 3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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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가 별도로 없던 탓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두개 정도의 주머니는 소지하고 다녔으며 형태나 쓰임세에 따라서 귀주머니, 두루주머니, 돈주머니 등으로 달리 불렸다. 남성의 경우 단색인 경우가 많았으나 여성이나 아이들의 주머니는 꽃, 동물 등 여러 수를 놓았다.<ref>조병수,《우리나라 기념주화》, 오성K&C, 2006년, 341쪽.</ref>
 
주머니 또한 다른 한복과 마찬가지로 재질과 색상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신분에 따른 차등 적용이 있어〈중종실록〉에 따르면 상민이 비단으로 짠 주머니와 띠를 착용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ref name="한국고문서학회">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생활사》, 역사비평사, 2006년, 41쪽, 84쪽</ref> 저고리의 경우에는 원래 안쪽에 다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며 조선 후기가 되어 양복이 들어오면서 왼쪽 상단에 작은 주머니를 단 조끼가 등장하기 시작하게 된다.<ref name="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4》, 한길사, 2001년, 44쪽</ref>
 
=== 보자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