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터브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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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rriet Tubman Reward Notice 1849.jpg|thumb|left|250px|캠브릿지 “민주당”에 오른, 아라민타 (민티)와 그의 형제 헨리와 벤에 300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공고]]
=== 탈출하다탈출 ===
터브먼과 그의 형제 벤, 헨리는 1849년 9월 17일 탈출하였다. 터브먼은 당시 캐롤라인 카운티에서 포플라 넥이라는 [[플랜테이션]]을 경영하고 있던 앤서니 탐슨 박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의 형제도 거기서 일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예들이 다른 곳에 가 일하고 있었던 관계로, 일라이자 브로디스는 처음에는 그들의 탈출 사실을 못 알아챈 것 같다. 하지만 2주 후, 그는 캠브릿지 “민주당”에, 노예 셋 중 하나를 잡을 때마다 100달러를 주겠다는 현상금 [[포스터]]를 내걸었다.<ref>Larson, p. 78.</ref> 터브먼의 두 형제는 또 나름대로 떠난 후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벤은 아버지가 막 된 참이었으며, 둘은 결국 앞에 놓인 위험에 겁을 먹고 스스로 다시 돌아갔다. 그로 인해 터브먼도 그들과 함께 돌아가야만 했다.<ref>Larson, pp. 78–79.</ref>
 
얼마 안 가 터브먼은 이번에는 홀로 탈출을 감행하였다.<ref name="Lar80">Larson, p. 80.</ref> 그는 탈출하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려하였다. 그는 믿음직한 친구였던 매리를 찾아, 암호처럼 쓰이던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아침에 보자꾸나, 나는 약속된 땅으로 간다."<ref name="QBra19">Bradford (1971), p. 19.에서 인용</ref>
 
=== 지하철도 ===
그가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터브먼은 ‘[[지하 철도]]’(Undergraund)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광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였다. 이 비공식적이지만 잘 짜여진 조직망은 자유 흑인, 백인 노예 폐지론자, 그리고 기독교인 운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독교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공동체]]로는 종종 [[퀘이커]]라 불리는 [[친우회]] 조직이 있었다.<ref name="Lar80"/> [[퀘이커]]와 [[메노나이트]] 교회는 미국 [[개신교]] 교회에서 마이너리티였지만,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역사]]적, [[사회]]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콘텍스트]]적(상황적)해석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교회였고, [[노예제]]에 대해서도 성서의 [[인권]]사상에 근거하여 투쟁했다.<ref>《두 얼굴을 한 하나님,성서를 통해서 본 노예제》(김형인,살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