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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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의 지형은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의 형태였다. 또한 행주산성은 말이 좋아 산성이었지 높이가 120m 밖에 안되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였고 지대 역시 험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행주산성은 그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성벽도 매우 낮은 토성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토성 위를 목책으로 둘러싼채 싸움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조선군은 휘하 다이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비격진천뢰 및 신기전 같은 최신 무기들과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 그리고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까지도 퍼부어 7차례에 걸친 적의 총공격을 모두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최소 5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및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혔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또한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와 [[비격진천뢰]]도 맹활약한 바 있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 전투 후 ==
권율은 농성에 성공하였으나, 곧 행주산성을 버리고 김명원과 합류하였다.
 
== 행주치마 ==
행주대첩시의 성내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행주산성은 규모가 작은 토성일뿐만 아니라 산성이었기 때문에 산성안에 민간인이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출처}}.
 
[[1527년]] [[최세진]]이 편찬한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하였다. 고로 행주치마가 행주대첩시에 유래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