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호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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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호는 몽고의 목자라는 뜻이나 이들이 몽고인이라는 출처는 사서 한 곳도 나와있지 않다.부원 세력의 제주인(고려인)으로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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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호의 난'''('''牧胡의 亂''')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당시 [[원나라|원]](元)의 목장이 있던 [[제주도]](濟州島)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고려인 목자(하치)인 목호(牧胡)들이 주동해 일으킨 반란이다.당시 제주는 고려에 반환되었으나 목장은 원나라가 운영하였는데 당시 목장에서 일을 하는 목호들은 부원 세력으로 있었다. '''하치의 난'''('''合赤의 亂''') 또는 난이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갑인의 변'''('''甲寅의 變''')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배경 ==
[[삼별초의 난|삼별초에 의한 대몽항쟁]]이 여·몽 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고려 원종|원종]](元宗) 14년([[1273년]]) 이후, 원은 삼별초가 점거했던 탐라에 군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에는 황실의 말을 탐라에 방목해 목장을 설치하였다.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제주도는 그대로 원 조정의 목장 기능을 했는데, 이 목장에서 말을 치는 몽골인들을고려인들을 [[목호]](牧胡)라고 불렀다.
 
목호의 숫자는 많을 때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으며, 약 1백 년 동안을 제주도에 주둔하며 현지 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말 기르는 기술을 전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탐라에 파견된 고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부패로 인한 탐라 주민들의 반발심을 교묘히 선동하여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획책하기도 했다.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 고려와 수교한 [[명나라|명]](明)은 고려에 대해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북쪽으로 쫓겨간 원의 잔당([[북원]])을 치는데 필요한 [[제주마]](濟州馬) 2천 필을 바칠 것을 고려에 요구하였는데, 제주 목호의 지도자였던 석질리필사 · 초고독불화 · 관음보 등은 이에 반발하여 "세조(世祖)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방목하신 말을 우리가 어찌 적국인 명에 보낼 수 있단 말인가?"<ref name="Goryeosa">《고려사》권제113, 최영전</ref>라며 350필만 내어주었고, 명의 사신의 항의에 고려 조정은 마침내 탐라를 정벌할 것을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