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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중세 초기}}
[[파일:Charlemagne denier Mayence 812 814.jpg|thumb|150px|[[카롤루스 대제]]가 새겨진 [[데나리우스]]. ]]
4세기 이래 각지에 이동한 [[게르만족]]은 [[앵글로색슨인|앵글로색슨족]]이나 [[서고트인|서고트족]]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랑크 왕국]]이나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치하에 흡수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카를 마르텔]]의 사라센 제국의 격퇴로 [[궁재]](宮宰)의 힘이 강대해졌으나, 8세기에는 [[피핀 3세|피핀]]에 의해서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무렵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황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했으나, 교황 또한 그리스 교회와 대항하기 위해 세속 군주와의 유대를 바라고 있었다. 여기서 프랑크 왕국에서는 봉건제의 기반이 성립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중세에 있어서의 교황과 군주와의 제휴, 상호 이용이 전개되었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번영의 뒤를 이어, 6세기 말부터 슬라브족의 발칸에의 이주와 국내의 반란에 동시에 시달렸다. 그러나 7세기 초부터 이 제국은 둔전병(屯田兵)과 군관구 제도 등을 채용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해서, 7세기 말 사라센군의 침입을 방위했다. 또한 8세기 초에는 우상숭배 문제를 계기로 하여, 로마 교회와 대립하기 시작하고, 제국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스적 국가로서의 특색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5~6세기까지 서유럽 외의 세계는, [[사산 왕조]]로 대표되는 이란 문명권과, 동로마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문명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7세기에 이슬람교가 성립되자, 종래의 여러 문명을 계승하면서도 이들의 문명권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인 이슬람 문명을 만들어냈다. 이슬림교의 교조인 [[무함마드|무하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알라]]에의 절대적 귀의를 가르쳤다. 그는 한때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하였는데, 드디어 아라비아 전부족을 통일하여 이슬람 세계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무하마드의 사후, 역대 [[칼리파|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확립과 발전에 노력했기 때문에, 불과 1세기 동안에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인도로부터, 서로는 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사라센 제국이다. 정복사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제3대 오스만 시대 무렵부터 교단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카를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됨으로써 그 막이 열렸다. 이에 카를 대제는 교황에 의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로마 제국 이래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비잔틴 세계나 이슬람 세계와 구별되는 이른바 중세 유럽 세계라는 정치, 문화적 공동체였다. 카를 대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켜 민족 이동기의 쇠퇴했던 문화를 부흥시키고, 게르만·로마·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요소를 융합시켜 오늘날까지도 내려오는 서유럽 공통의 출발점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고대 이래로 교역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어 온 지중해가 [[사라센]]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됨으로써 서유럽 세계에서는 교환경제 사회가 자연경제 사회로 후퇴하게 되었던 까닭에, 대제의 사후에는 왕국도 분열되어 [[동프랑크 왕국|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 왕국|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 등 3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도 색슨계의 통일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무렵의 유럽에서는 점차 장원제가 보급됨과 아울러 지배자와의 사이에 주종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장원의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나중에 영주권이 강화되어 왕권과 대립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방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한편, 교회도 이른바 교회령을 가지게 되며, 이 무렵에는 그 권력이 세속의 영주와 다를 바 없게 됨으로써 여기서 중세의 소위 2원적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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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성기 ===
{{본문|중세 성기}}
11~12세기의 유럽 세계에서 특기할 사건은 노르만의 영국 정복을 비롯하여 세속적 왕권 대 교황권의 대립과 회교도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교 국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 등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던 게르만계의 [[노르만인]]은 그들의 발달된 항해술과 약탈 행위로 유럽 여러 나라를 괴롭히더니, 1066년에는 영국을 점령하고 이어 대륙에서의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빈번히 대립하였다. 한편 중국사에서 흉노로 알려진 훈족 계통의 [[마자르족]]이 [[헝가리 왕국]]을, [[서슬라브족]]이 폴란드 왕국을 건국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가톨릭 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배자인 가톨릭 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으며, 이에 세속계의 최고 권력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성직의 서임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법황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졌던 정면 충돌은 그 두드러진 예였다. 이 충돌의 결과로 헨리 4세는 [[카노사의 굴욕|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것으로 된 반면에 속세의 황제권은 점차 쇠퇴되었으며, 이와 같이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권 국가가 회교권 국가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났다.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을 가졌던 십자군 원정은 1096년에서 1100년에 이르기까지 3회에 걸쳐서 단행되었으며, 이 십자군 원정은 후세의 정치·경제·교통 등 여러 면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여러 영향은 중세 대학인 [[볼로냐 대학교|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교|파리 대학]], [[옥스퍼드 대학교|옥스퍼드 대학]] 등이 끼친 여러 방면의 영향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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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중세 후기}}
[[파일:Doktorschnabel 430px.jpg|thumb|150px|[[흑사병 의사]]. [[흑사병]]의 유럽 유입 경로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으나 [[몽골 제국|몽골]] 침략이 유력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13~14세기에는 [[당나라|당]]에 밀린 [[셀주크 투르크|셀주크 투르크족]]의 서방 진출이 십자군 운동을 유발해 4차 십자군이 마침내 동맹국인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라틴 제국을 건설하여 정치, 경제적 욕망을 드러내면서 봉건제의 해체를 알린 것이나, [[튀르크족|터키족]]의 서천 후에 나타난 중앙아시아에서의 세력권 공백과 [[요나라|요]], [[금나라|금]]의 교체로 인한 몽골고원의 지배권 공백을 이용한 [[칭기즈 칸|칭기즈칸]]의 유목제국이나 그 발전인 세계제국이 출현하는 등 세계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운동 이후 그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가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고 [[한자 동맹|한자 도시 동맹]]과 더불어 원거리 무역과 도시발달을 추진하였다. 화폐 경제의 농촌 침투는 지대의 금납화, 직영지의 해방을 비롯한 장원제의 해체를 촉진하는 한편 도시에서는 귀족화한 상인의 지배를 타파하는 [[길드]] 혁명이 진행되어 공장제 수공업화가 진전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운동의 실패로 실추된 교황권이나 황제권을 대신하여 왕권이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고 사치를 하기 위해 과세 증가가 기도되었으나 이를 견제하려는 도시인의 정치적 발언권과 충돌한 끝에 마침내 성직귀족, 세속귀족, 도시민을 대표하는 영국의 자문의회나 프랑스의 [[삼부회]] 같은 신분제 의회를 가지게 되어 중세 국가는 신분제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왕권강화가 추진되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백년 전쟁]]이 일어났고, 교황은 프랑스 왕에 의하여 [[아비뇽 유수|아비뇽에 유폐]]되는가 하면, [[서방 교회의 분열|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교권의 쇠퇴와 왕권의 강화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서 그 성격도 달랐다. 귀족 세력이 강했던 독일은 연방제 국가를 이루었고, 상업 자본이 축적되었던 이탈리아에서는 데스포트와 같은 전제군주제가 실현되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에의 대결의 필요성으로 그리스도교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으며 서유럽의 방패가 되었던 [[비잔틴 제국]]은 재흥된 뒤에도 계속적인 위협하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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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중세 유럽의 과학|중세의 우주론}}
 
아라비아과학이 그리스과학의 번역사업에서 비롯하였듯이, 서유럽 크리스트교국의 문화활동은 아라비아과학 ― 실질적으로는 아라비아어역의 그리스과학 ― 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서 시작된다. 당시 아랍어를 번역할 수 있는 학자는 극소수였는데 11세기의 아프리카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최초의 적격자였다. 그는 카시노산의 수도원에서 많은 아라비아 서적을 라틴어로 옮겨 놓았다. 그러한 번역서에는 막대한 지식과 경험이 채워져 있었다. 유럽의 진보적인 학자가 받은 자극은 통렬하였다.
 
12세기부터 13세기 중엽에 걸친 크리스트교도 학자의 제일 첫째의 학문 활동은 아라비아어를 배워서 아라비아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는데, 뛰어난 번역가가 뒤를 이어 나타났다. 에스파냐는 그 지리적 관계에서 회교도와 크리스트교도와의 접촉점이며, 특히 [[톨레도]]는 회교도에 둘러싸인 크리스트교국이라는 지위에 있었는데, 톨레도의 대사교(大司敎)는 자기 교회 내에 번역소를 두고, 많은 학자를 모아서 번역사업에 종사케 하였다. 가장 뛰어난 번역자로서 유명한 크레모나의 제럴드(바르게는 헤럴드, 12세기 후반에 활동)는 처음에 이 번역소의 조수였다. 그는 아라비아어역의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갈레노스]], [[히포크라테스]] 등의 92권의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13세기의 중엽까지는 아라비아어의 과학문헌으로 중요한 것은 모두 라틴어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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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사}}
{{Authority전거 control통제}}
 
[[분류:유럽의 중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