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클리오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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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610년]] - [[641년]]
|황후=에프도키아 <br />마르티나
|이전 황제=[[포카스]]
|다음 황제=[[콘스탄티누스 3세]]
|목록=[[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동로마 황제]]
}}
'''헤라클리우스''' 또는 '''헤라클레이오스'''({{llang|la|Flavius Heraclius Augustus}}, {{llang|el|Ηράκλειος}}, [[575년]] - [[641년]] [[2월 11일]])는 [[610년]] 악정을 펼치던 전임 황제 [[포카스]]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남쪽의 [[이슬람]]이 발흥하여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를 잃었지만 [[군관구제]]와 [[둔전병제]]를 최초로 실시하여, 무너져가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와 행정을 개편하고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등 제국을 민심에 맞게 변화시켰다. 열강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풍전등화 상태였던 동로마 제국이 그가 창안하고 정착한 군사·행정조직 덕분으로 이후 800년이나 더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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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리우스는 이란과의 전쟁에 앞서 [[아바르족]]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 [[619년]] 아바르족과 [[트라키아]]의 헤라클레아에서 협상을 했으나 아바르족의 배신으로 거의 사로잡힐 뻔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622년]] 헤라클리우스는 아바르족의 배신을 용서하고 그들과 강화를 맺고 이란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622년]] [[부활절]] 다음날에 헤라클리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수도를 떠나 이란 원정을 떠났는데 이란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해로로 이동하였다. [[로도스 섬]]을 지나 [[소아시아]]의 남쪽 해안을 돌아 [[이수스]]에 상륙하였는데 이때 성전을 주창하여 사실상 최초의 [[십자군]]을 이끌었다.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흑해]]로 진격했고 이란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그 해 겨울, 그는 병사들을 [[폰투스]]에 남겨두고 해로를 이용해 콘스탄티누폴리스로 귀환했다.
 
이란 원정 2년째, 그는 더욱 눈부신 전승을 거두었다. 그의 군대는 [[아르메니아]]를 거쳐 호스로 2세가 있는 간자크로 쳐들어갔고 승리를 거두어 호스로를 [[니네베]]로 퇴각시켰다. 병사들은 이란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향해 진군하고 싶어했지만 아내 마르티나가 출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헤라클리우스는 돌아가고 싶었다. 헤라클리우스는 병사들에게 진퇴문제를 [[하느님]]에게 맡기기로 하고 [[성서]]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기로 했다. 사흘 동안 금식기도를 한 뒤 군대 앞에서 성서를 펼쳐 눈에 띄는 구절을 읽었는데 비록 정확히 어떤 구절이 나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철수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
 
그 후 동로마군이 [[아나톨리아]]로 후퇴하는 도중 사루스 강 서안에 진을 쳤을 때, 이란군이 맞은편 강둑에 갑자기 나타났다. 동로마군은 성급하게 적을 쫓아 다리를 건너 돌진했다가 매복하고 기다리던 적군에게 섬멸당하고 말았다. 제국군이 처음 당하는 패배였는데 자칫 괴멸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때 헤라클리우스는 거의 초인적인 용맹을 발휘하여 다리로 달려가 이란군을 무찔렀다.
 
[[626년]] 이란군은 아바르족과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폴리스]]를 협공하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진격했고 [[6월 29일]] 아바르족은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벽을 포위했다. 수도의 군대와 주민들은 두달간의 공격을 성벽안에서 막아내고 이란군을 싣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널 예정이던 아바르족의 함대를 격침시켰다. 결국 이란의 지원도 받지 못한 아바르족은 후퇴했다.
 
헤라클리우스는 수도의 위협이 제거되자 다시 이란을 침략했고,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방을 가로질러 티그리스 평야로 진격한 뒤 [[627년]] [[12월 12일]] 니네베 유적지 근처에서 이란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헤라클리우스는 이란의 장군 3명과 일대일 대결을 벌여 승리했고, 앞장서서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적군을 물리쳤다. 한달 뒤, 연패한 호스로는 도망치고 헤라클리우스는 엄청난 보물이 있는 다스타기르드에 무혈입성했다. 이듬해 호스로 2세는 폐위당했고, 새로운 이란 황제는 헤라클리우스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헤라클리우스가 요구한 것은 [[성십자가]]와 포로 및 이란이 점령한 [[동로마 제국|로마]] 영토를 돌려달라는 것뿐이었다. [[628년]] [[9월 14일]] 헤라클리우스는 성십자가를 앞세워 당당히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로 개선하였다. [[629년]]에 그는 직접 [[그리스도]]의 성십자가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해 [[성묘 성당]]에 안치하였다.
 
=== 이슬람의 발흥과 말년 ===
당시 아라비아의 황량한 사막에서 무섭게 세력을 키운 [[이슬람]] 세력은 순식간에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여 [[634년]] 시리아를 침공했다. 당시 헤라클리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단성론|그리스도 단성론]]으로 갈라진 제국의 기독교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결국 실패한 상태였다.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은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황제는 대군을 편성하여 이슬람에 맞섰으나 [[636년]] 제국군은 야르무크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패배했다. 곧이어 시리아와 이집트가 잇달아 이슬람에게 넘어갔고 [[637년]]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헤라클리우스는 심각한 병에 걸려 쇠퇴하고 있었다. 이슬람에게 패한후 그는 겨우 몸을 추스려 수도로 귀환했는데 공수병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널 수 없었다. 몇주 동안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연안에 머물러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나뭇잎으로 물이 보이지 않게 가린 부교를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황후 마르티나는 전 황후 에프도키아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3세]]와 자신의 아들인 [[헤라클로나스]]가 공동황제가 되게 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두사람은 공동황제가 되었다. 말년에 헤라클리우스는 마지막으로 단성론 문제를 해결하고자 《진술》(''Ekthesis'')이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네 곳의 [[총대주교]]의 승인을 받았으나 [[641년]] 초 새로운 [[교황 요한 4세|로마 교황 요한 4세]]의 비난을 받았다. 거기에다가 이슬람군이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의지를 상실한 황제는 [[641년]] [[2월 11일]] 여러 가지 병(수종과 전립선비대증이나 요폐증으로 추정된다)으로 고통받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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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포카스]] <br /> (602 - 610)
|후임자=[[콘스탄티누스 3세]] <br /> (641)
|임기=[[610년]] - [[641년]]
|직책=[[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동로마 제국의 황제]]
}}
{{로마 황제}}
{{Authority전거 control통제}}
 
[[분류:575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