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고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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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제96대 [[일본 천황]]
|재위 = 1318년 3월 29일-1331년 10월 21일
|대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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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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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년]] [[11월 26일]] – [[1339년]] [[9월 19일]])은 96대 일본 천황이다. [[메이지 천황]] 즉위 이후의 사학자들은 그의 치세를 [[1318년]]에서 [[1339년]]까지로 산정하지만 그 이전에는 [[1318년]]에서 [[1332년]]까지로 고려되었다. 그때 그는 북조 쇼군·[[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폐위당하였다. 9세기에 재위했던 [[다이고 천황]]의 이름을 따라서 지어졌다. 휘는 다카하루(尊治)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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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쿠후 타도 계획 ===
 
[[쇼추|쇼추(正中)]] 원년([[1324년]]) 4월, 고다이고 천황의 가마쿠라 바쿠후 타도 계획이 발각되고, 로쿠하라 단다이에 의해 천황의 측근 히노 스케토모(日野資朝) 등이 처분받는 사건이 일어난다.(쇼추의 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괴이한 점은 주모자 색출 과정에서 정작 최고 주동자였던 천황에 대해서 바쿠후는 어떠한 처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황은 이후로도 은밀하게 바쿠후 타도를 꾀하면서 다이고사(醍醐寺)의 승려 몬칸(文觀)이나 홋쇼지(法勝寺)의 엔칸(円觀) 등의 승려를 끌어들여, [[겐토쿠 (1329년)|겐토쿠(元德)]] 2년([[1329년]])에는 중궁 사이온지 키시(西園寺禧子, 후지와라노 키시)의 순산 기도를 핑계로 은밀히 간토 조복의 기도를 행하면서 고후쿠사나 엔랴쿠사 등 난토(南都, 나라)의 지샤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다만 당시의 유력 권문이었던 사이온지 집안 소생의 친왕은 구니요시 친왕 계통에 맞설 유력한 황위계승자가 될 수 있었으므로, 실제로 순산 기도가 목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친(親)다이카쿠지통 계열의 귀족들은 원래 구니요시 친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지묘인통이나 바쿠후도 기본적으로는 그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천황은 점차 궁지에 몰렸다. 더욱이 구니요시 친왕이 병으로 훙거하자 지묘인통의 적자인 카즈히토(量仁) 친왕이 바쿠후의 지명으로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퇴위의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겐코 (1331년)|겐코(元弘)]] 원년([[1331년]]), 또 한 번, 천황이 주도한 바쿠후 타도 계획이 측근 요시다 사다후사(吉田定房)의 밀고로 발각되면서 천황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 위기 앞에서 천황은 교토 탈출을 결단, 마침내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거병한다. 처음에는 히에이 산으로 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사기(笠置) 산(지금의 교토부 소우라쿠군 카사기쵸 내)에서 농성하며 군사를 모았으나, 바쿠후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결국 이듬해 성은 함락되고 천황은 사로잡혔다.(겐코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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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조 시대의 시작 ===
 
아시카가군이 교토로 들어오자, 천황은 그를 피해 히에이 산으로 도망쳐 저항했지만, 아시카가측의 화친 요청에 따라 삼종의 신기를 아시카가측에게 건네주었고, 다카우지는 고곤 상황의 인세이 형식으로 지묘인통의 [[고묘 천황|고묘(光明) 천황]]을 신황으로 옹립, 겐무시키모쿠(建武式目)를 제정하고 교토에 새로이 바쿠후를 열었다.([[무로마치 막부|무로마치(室町) 바쿠후]]) 한편 고다이고 천황은 유폐되어 있던 카잔인(花山院)에서 도망쳤다. 다카우지에게 넘겨주었던 신기는 가짜라 주장하며, 천황은 요시노(지금의 [[나라 현]] 요시노군 요시노쵸)에 따로 조정을 세웠다. 이로써 교토의 조정(북조)과 요시노의 조정(남조)이 병립하는 [[남북조 시대 (일본)|남북조(南北朝) 시대]]가 시작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요시(尊良) 친왕이나 츠네요시 친왕 등을 닛타 요시사다에게 받들게 하여 호쿠리쿠(北陸)로 보내고, 가네요시(懐良) 친왕은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 큐슈에, 무네요시(宗良) 친왕은 토고쿠, 노리요시(義良) 친왕은 무쓰 국으로 보내는 등, 자신의 황자들을 각지에 보내 북조측에 맞서려 했다. 하지만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끝내 병으로 쓰러져 [[엔겐|엔겐(延元)]] 4년 즉 [[랴쿠오|랴쿠오(曆應)]] 2년([[1339년]]) 8월 15일에 요시노에 돌아와 있던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한다.([[고무라카미 천황|고무라카미(後村上) 천황]]) 그리고 다음 날, 요시노의 금륜왕사(金輪王寺)에서 반드시 역적(다카우지)을 토멸하고 교토를 되찾을 것을 유언으로 남긴 채 붕어한다. 향년 52세(만 5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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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 : 고코쿄쿠인(後京極院) 사이온지(후지와라) 키시(西園寺(藤原) 禧子) (1303-1333) 사이온지 카네자네(西園寺 実兼)의 딸
** 황녀 : ? (1314-?)
** 황녀 : 신시츠쵸인(新室町院) 센세이몬인(宣政門院) 요시코(킨시) 내친왕(懽子 内親王) (1315-1362)
* 황후 : 쥬시 내친왕(珣子 内親王) (1311-1337) - [[고후시미 천황]]의 황녀
** 황녀 : 사치코(코우시) 내친왕(幸子 内親王) (1335-?)
* 뇨고 : 안후쿠텐(安福殿) 산죠(후지와라) 시게코(에이시)(二条(藤原) 榮子) - 산죠 미치히라(二条 道平)의 딸
* 텐지 : 츄나곤텐지(中納言典侍) 카잔인(후지와라) 타시코(신시)(花山院(藤原) 親子) - 카잔인 무네타시(花山院 宗親)의 딸
** 황자 : 하나조노노미야(花園宮) 미츠요시 친왕(満良 親王)
* 텐지 : 다이나곤텐지(大納言典侍) 키타바타케(미나모토)씨(北畠(源)氏) - 키타바타케 모로시게(北畠 師重)의 딸
* 텐지 : 신안사츠텐지(新按察典侍) 지묘인(후지와라)씨(持明院(藤原)氏) - 지묘인 야스후지(持明院 保藤)의 딸
* 텐지 : 스이텐지사누키(帥典侍讃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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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지 : 쇼쇼나이시(少将内侍) 스가와라씨(菅原氏) - 스가와라 이마나카(菅原 在仲)의 딸
** 황자 : 쇼죠 법친왕(聖助 法親王)
* 후궁 : 신타이켄몬인(新待賢門院) 아노(후지와라) 야스코(레이시)(阿野(藤原) 廉子) (1301-1359) - 아소 킨야스(阿野 公廉)의 딸이자 토우인 킨카타(洞院 公賢)의 양녀
** 황자 : 츠네요시 친왕(恒良 親王) (1325-1338)
** 황자 : 나리요시 친왕(成良 親王) (1326-1344)
** 황자 : '''노리요시 친왕(義良 親王) - ([[고무라카미 천황]])'''
** 황녀 : 쇼우시 내친왕(祥子 内親王)
** 황녀 : 이시 내친왕(惟子 内親王)
** 황녀? : 신센요몬인(新宣陽門院) 노리코(켄시) 내친왕(憲子 内親王) (1345?-1391?)
* 후궁 : 토우인(후지와라) 모리코(스시)(洞院(藤原) 守子) (1303-1357) - 토우인 사네야스(洞院 実泰)의 딸
** 황자 : 겐엔 법친왕(玄円 法親王)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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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자 : 손세이 법친왕(尊性 法親王)
** 황녀 : ? - 고노에 모토츠구(近衛 基嗣)의 부인
* 후궁 : 곤다이나곤노 츠보네(権大納言局) 니죠(후지와라) 타메코(이시)(二条(藤原) 為子) - 니죠 타메오(二条 為世)의 딸
** 황자 : 이치노미야(一宮) 타카요시 친왕(尊良 親王) (?-1337)
** 황자 : 무네요시 친왕(宗良 親王) 또는 손쵸 법친왕(尊澄 法親王) (1311-1385)
** 황녀 : 켄시 내친왕(瓊子 内親王) (1316-1339)
** 황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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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궁 : 토우인(후지와라) 사네코(지츠시)(藤原(洞院)実子) - 토우인 사네오(洞院 実雄)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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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자 : 무몬겐센(無文元選) (1323-1390)
* 후궁 : 레이쇼인(霊照院) 니죠(후지와라)씨(二条(藤原)氏) (?-1351) - 니죠 타메미치(二条 為道)의 딸
** 황자 : 키와요시 친왕(躬良 親王) 또는 호닌 법친왕(法仁 法親王) (1325-1352)
** 황자 : 친제이노미야(鎮西宮) 또는 츠쿠시노미야(筑紫宮) [[카네요시 친왕]](懐良 親王) (1329-1383)
** 황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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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자 : 다이고노미야(醍醐宮) 손신 법친왕(尊真 法親王) 또는 코손 법친왕(杲尊 法親王)
* 후궁 : 다이나곤노 츠보네(大納言局) 토우인(후지와라)씨(洞院(藤原)氏) - 토우인 킨사토(洞院 公敏)의 딸
** 황녀 : 유시 내친왕(瑜子 内親王)
* 후궁 : 우에몬토쿠노 츠보네(左衛門督局) 니죠(후지와라)씨(二条(藤原)氏) - 니죠 타메타다(二条 為忠)의 딸
** 황녀 : 킨린니쇼(今林尼衆)
* 후궁 : 콘츄나곤노 츠보네(権中納言局) 토우인(후지와라)씨(洞院(藤原)氏) - 토우인 킨야스(洞院 公泰)의 딸
** 황녀 : 사다코(데이시) 내친왕(貞子内親王)
* 후궁 : 요시다(후지와라)씨(吉田(藤原)氏) - 요시다 사다후사(吉田 定房)의 딸
* 후궁 : 보몬노 츠보네(坊門局) - 보몬 키요타다(坊門 清忠)의 딸
** 황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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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궁 : 호리구치(미나모토)씨(堀口(源)氏) - 호리구치 사다요시(堀口貞義)의 딸
** 황녀 : ? - 요시미즈인 무네노부(吉水院 宗信)의 부인
* 후궁 : 쇼쿤몬인고노에노 츠보네(昭訓門院近衛局)
** 황자 : 시로히토왕(知良王)
* 생모 불명
** 황녀 : 요도니(用堂尼) (?-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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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황의 측근이었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는 《[[신황정통기|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보수적 문신관으로 신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 근세에 들어서는 고다이고 천황을 부덕한 군주로 인식하는 평가가 정착되었는데,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명에 의해 편찬된 《대일본사》에서는 남조를 정통으로 하는 입장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부덕했다고 평가하는 인식을 볼 수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독사여론》에서 왕조 정치가 쇠퇴하고 무가 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은 누대에 걸친 천황이 실덕이 한 원인이었다는 관점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그 말미에 붙였다.
*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하면서도 즉위 직후의 친정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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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288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