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Koraena (토론 | 기여)
Ryuch (토론 | 기여)
14번째 줄:
[[김일성]]이 다니던 [[만주]]의 [[화성의숙]] 교장이었던 [[최동오]]의 아들이다.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군에서 근무하던 최덕신은 [[1946년]] 귀국하여 최동오와 장인 류동열의 권유를 이기지 못해 1947년 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특별반 3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소위로 임관하였다. 최덕신은 소위 임관 뒤 소령으로 특별 진급하였다. 최덕신은 대전의 2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중령으로 승진했다. 2연대 연대장직을 수행하던 그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ref>{{뉴스 인용|제목=최동오와 아들 최덕신 고단한 민족사 넘나들다 애국렬사릉에 나란히 묻히다 |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449 |출판사=민족21 |저자=손홍규 |날짜=2004-02-01 |확인일자=2009-06-16}}</ref> 국방부는 1948년 12월 15일, 육군사관학교 교장이던 최덕신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12310020920203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12-31&officeId=00020&pageNo=2&printNo=7787&publishType=00020|제목=陸軍八中領昇進 |출판사=동아일보 |날짜=1948-12-31 }}</ref> [[1949년]] [[미국]] 포트 라일리({{lang|en|Fort Riley}}) 육군포병학교를 졸업(초등군사반), [[1950년]] [[미국]] 포트 베닝({{lang|en|Fort Benning}}) 보병학교를 졸업(고등군사반)하였다. 또한 제3사단장(1949년 5월 12일~)<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52000209202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5-20&officeId=00020&pageNo=2&printNo=7909&publishType=00020 |제목= 각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출판사=동아일보 |날짜 = 1949-5-20 |인용문=<!--국방부에서는 군 내부확장에 따라 지난 12일부로 관내 각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각 사단 최고책임자의 이동은 다만 제2사단에 유승렬(劉升烈) 대령, 제3사단 최덕신(崔德新) 대령, 제5사단 송호성(宋虎聲) 준장, 제6사단 유재흥(劉載興)대령 등이 각각 임명되었으나 제1사단과 제2사단 책임자만은 유임되어 있는 셈이다.-->}}</ref> 과 국군 제1군단장을 거쳐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여 5.16 직후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63년 8월 9일, [[한독 관계|서독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8070032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07&officeId=00032&pageNo=1&printNo=5472&publishType=00020| 제목 = 瑞典大使에- 劉載興씨任命 | 날짜 = 1963-8-7 | 출판사 = 경향신문 |인용문 =西獨大使에는 崔德新前外務部長官이 決定되어 있다. )}}</ref><ref>{{뉴스 인용 |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8100020920102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10&officeId=00020&pageNo=1&printNo=12857&publishType=00020 |제목=주서독대사에 최덕신씨 발령 |출판사= 동아일보|날짜= 1963-8-10|쪽=1 }}</ref> 이어, 통일원 고문, 주 [[베트남]] 공사, 한중일보 사장([[1972년]]) 등을 지내다가<ref>약력: 외교통상부 [http://www.mofat.go.kr/mofat/mk_a007/mk_b041/mk_c90/1172562_27881.html 제9대 외무부장관 최덕신 프로필]</ref> [[미국]]으로 망명했다.<ref>이수강,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15615 최덕신씨 북한행의 '정설'?], 오마이뉴스</ref>
 
[[1986년]] [[4월]] 아내 [[류미영]]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ref>1986년 4월~: 《조선일보》 (2001.1.27.) [http://nk.chosun.com/news/news.html?ACT=detail&res_id=4469&page=3123 류미영씨 평양서 사돈 상봉 불발]</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청우당 당수 외에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의 여러 직위를 맡았으며, [[조국통일상]]도 수상했다. 2007년 기준으로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어 있다.<ref>《중앙일보》 (2007.7.10)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787259 한국 언론이 처음 가 본 북한 '열사릉' 〈하〉]</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