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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은 무관 [[조선 태조|이성계]]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이후 500여 년 동안 존속됐다. 조선은 [[유교]]에 의한 통치 이념을 기본으로 [[군주|임금]]과 신하에 의한 치를 중요시했다.
 
조선이 통치하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한글]](훈민정음)의 창제와 과학 기술 및 농업 기술의 발달 등이 이루어졌으며,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외침을 극복하고, 현재의 [[한민족]]과 [[한국]] 문화의 직접적 전통의 기반이 되는 문화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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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6-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후금)과 치른 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삼전도비|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의 임금 [[조선 효종|효종]]이 얼굴에 났던 종기(부스럼)에서 피가 지혈이 안 돼서 세상을 갑작스럽게 뜨자,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모두 띈 일종의 정당으로, 각 붕당은 국가의 공론(여론)을 따름으로써 여당이 되려고 노력했다. 각 붕당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여 스스로 부패하는 것을 경계했다. 각 붕당은 지방의 서원을 통해 그들의 스승에 제사를 지내고 결속을 다졌는데, 이 서원의 교장 격인 '산림' 은 조선 중앙정부의 삼사 언관직 선비들과 함께 공론(여론)을 형성했다. 조선의 이와 같은 여론정치는 당대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정치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남인의 허적이 자기 마음대로 왕실 물건을 사용해서 당시 숙종은 분개하였다.)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고, 그기야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이 일어나면서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이라는 '붕당 정치의 원칙'이 무너지고 특정한 붕당이 다른 정권의 붕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면서 국왕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정치에 개입이 되어 국정이 마비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이 때문에 여러 붕당 간에 갈등과 오해로 서로 죽이고 또 죽이는 당쟁으로 인해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 이선이 뒤주 안에 갖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래서 왕권이 신하들에 의해 약해지자 당쟁을 막기 위해 [[조선 영조|영조]]와 [[조선 정조|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기용([[탕평책]])을 실천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에 갑작스럽게 종기의 염증으로 세상을 뜨자 노론세력이 독점하여 정국을 이끌었지만, 19세기의 [[조선 순조|순조]]·[[조선 헌종|헌종]]·[[조선 철종|철종]] 등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들 외척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풍양 조씨의 가문의 대표였던 [[신정왕후 (조선)|조대비]])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명복([[조선 고종|고종]])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