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74번째 줄:
[[File:Friedrich II. mit Sultan al-Kamil.jpg|thumb|left|알카밀(우측)을 만나는 프리드리히 2세(좌측). [[조반니 빌라니]]의 《[[신연대기]]》 삽화.]]
1217년, 인노첸티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집트-시리아 일대의 살라흐 앗딘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5차 십자군]]이다. 지휘관은 [[헝가리왕]]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 폰 외스터라이히 공작|레오폴트 4세]]였고, 병력은 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 [[프리지아]]에서 모집되었다. 레오폴트와 [[장 드 브리엔]]이 [[다미에타]]를 공격해 함락시켰으나,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간 병력은 격퇴당하여 항복했다.<ref>{{Harvnb|Lock|2006|pp=168–69}}</ref><ref>{{Harvnb|Riley-Smith|2005|pp=179–80}}</ref> 다미에타는 무슬림들에게 반환되었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다.<ref>{{Harvnb|Hindley|2004|pp=561–62}}</ref>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조약을 파기하여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원래는 십자군을 지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 (예루살렘)|이사벨 2세]]와 결혼했기에 예루살렘 왕위를 요구할 수 있었고, 1228년 아크레에 도착했다. 무슬림들에게서 탈환된지 얼마 안 된 [[시칠리아]]에서 성장한 프리드리히 2세는 기독교 군주들 중 무슬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무슬림 근위병을 두고 심지어 [[하렘]]도 가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적 수완에 힘입어, [[제6차 십자군]]은 사실상 무력을 동원한 협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ref>{{Harvnb|Asbridge|2012|pp=566–71}}</ref> 예루살렘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에서 아크레로 이어지는 좁은 영토를 기독교도들에게 넘기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들은 무슬림들이 계속 통제하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 술탄]] [[알카밀]]과 동맹도 맺었다. 이런 조약을 맺는 것은 프리드리히가 이 일대 지역에 어떠한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케 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자기 직할령이 공격받자 프리드리히는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ref>{{Harvnb|Asbridge|2012|p=569}}</ref>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세속 제후들이 종종 원정을 벌였다. 1239년의 [[남작 십자군]]은 [[나바라왕]] [[티발트 1세]]와 [[제1대 콘월 백작 리처드|콘월 백작 리처드]]가 이끌었다. 이 십자군은 무력 외교와 아이유브조의 여러 파벌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음모 공작을 병행 실시했다.<ref>{{Harvnb|Asbridge|2012|p=573}}</ref> 이 때가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였다. 하지만 그 중흥은 어디까지나 이후 알카밀이 죽고 아이유브조가 분열되어 약화된 것에 기인했기에 사상누각과 같았다.<ref>{{Harvnb|Asbridge|2012|p=574}}</ref>
 
1244년, 한 무리의 [[화레즘 샤 왕조|화레즘]] 용병대가 이집트로 와서 다마스쿠스 토후 [[아스살리흐 이스마일]]과 계약했다. 그리고 화레즘 용병대는 [[예루살렘 공방전 (1244년)|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용병대가 제멋대로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 화레즘 용병들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뒤이어 [[라포르비 전투]]에서 기독교도들과 시리아 무슬림의 연합군을 격파했다.<ref>{{Harvnb|Asbridge|2012|pp=574–76}}</ref> 이에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7차 십자군]]이다. 제7차 십자군은 1249년 이집트에 도착했지만,<ref>{{Harvnb|Tyerman |2006|pp=770–75}}</ref> 성공하지 못했다. 루이는 [[만소우라]]에서 패배하고 다미에타 방면으로 후퇴하던 도중 포로로 붙잡혔다.<ref>{{Harvnb|Hindley|2004|pp=194–95}}</ref> 10년 기한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고 루이는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났다. 루이는 1254년까지 시리아에 머물면서 십자군 국가들의 공고화를 도모했다.<ref>{{Harvnb|Lock|2006|p=178}}</ref> 이후 1265년에서 1271년에 걸쳐, [[맘루크 왕조|맘루크조]] 술탄 [[바이바르스]]가 프랑크인들을 해안의 소규모 전초기지 몇 곳으로 내몰고 나머지 땅을 모두 빼앗아갔다.<ref>{{Harvnb|Tyerman|2006|pp=816–17}}</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