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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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오스만 튀르크는 [[발칸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동로마의 영향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한 뼘 밖에 남지 않았다. 1393년에는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시슈만]]이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이듬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서방 교회의 분열]]로 교황 세력이 아비뇽과 로마로 두쪽이 난 와중에도 튀르크족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십자군 소집을 선언했다.<ref name="Davies 1997 448">{{Harvnb|Davies|1997|p=448}}</ref> 이 십자군은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제국)|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지휘했다. 많은 프랑스계 귀족들이 지기스문트의 군대에 합류했으며, 그 중에서 [[장 1세 드 부르고뉴 공작|부르고뉴 공자 장]]이 두각을 드러냈다. 지기스문트는 십자군에게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다뉴브 강]]에 도달한 십자군은 바로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9월 25일 오스만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을 깨뜨리고 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ref>{{Harvnb|Lock|2006|p=200}}</ref>
 
오스만은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했고, 술탄 [[무라드 2세]]가 1444년 [[흑해]] 해변 [[바르나]]에서 [[바르나 십자군]]을 궤멸시켰다. 이 십자군이 교황청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4년 뒤에는 마지막 헝가리인 원정대도 격파되었다.<ref name="Davies 1997 448"/>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동로마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로마를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여세를 몰아 1456년 헝가리로 쳐들어왔고, [[후녀디 야노시]]가 [[베오그라드 공방전 (1456년)|베오그라드에서 농성]]했다.<ref>{{Harvnb|Lock|2006|pp=202–03}}</ref> [[교황 비오 2세|에네아스 실비우스]](훗날의 교황 비오 2세)와 조반니 다 카페스트라토가 십자군 소집을 선동했고, 신성로마제국의 공후들이 라티스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의회에서 원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결과가 나온 것이 없었다. 1487년 4월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보이아]], [[피에몬테]], [[도피네]] 일대에서 [[발도파]] 이단이 퍼지고 있으니 토벌을 위한 십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중 무언가 행동이 이루어진 곳은 도피네 뿐이었고, 그나마도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ref>{{Harvnb|Lock|2006|p=204}}</ref> 지중해 주변에서 오스만에게 유의미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체는 베네치아가 유일했지만, 베네치아의 소위 "십자군"은 어디까지나 상업적 이윤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은 1718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럽 기독교 세계가 무슬림 세계를 최대 가상적국으로 간주하는 것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다.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와 다투면서, 독일의 개신교도 제후들 뿐 아니라 무슬림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였다.<ref>{{Harvnb|Davies|1997|pp=544–45}}</ref>
 
=== 후스 십자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