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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
[[File파일:ConquestOfConstantinopleByTheCrusadersIn1204.jpg|thumb|1204년 동로마의 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204년)|함락시키는]] 십자군.]]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의 소집을 개시했다. 주로 프랑스에서 십자군이 모였지만 잉글랜드와 독일에서도 호응이 있었다.<ref>{{Harvnb|Tyerman |2006|pp=502–08}}</ref>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독일왕 [[필리프 폰 슈바벤]]은 자신들의 세속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했다. 단돌로의 목적은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해양력 확장이었고, 필리프는 자기 조카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와 매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를 동로마 황제로 복위시키고자 했다. 이 목적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임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알렉시오스 4세의 친삼촌)를 폐위시켜야 했다.<ref name="Davies 1997 359–360">{{Harvnb|Davies|1997|pp=359–60}}</ref> 베네치아에 도달한 기사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베네치아인들에게 배삯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약탈을 해서 배삯을 충당하기로 했다. 그 전초전으로 십자군은 기독교도 도시인 [[자다르]]를 공성했다. 식겁한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을 즉각 [[파문]]했다.<ref name="Lock 2006 158–159">{{Harvnb|Lock|2006|pp=158–59}}</ref> 이 파문은 나중에 철회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암살당하면서 원정의 본래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그 뒤 일단 물러갔다가 두 번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이번에는 도시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1204년)|약탈]]하여 교회를 분탕질하고 시민들 다수를 학살했다. 제4차 십자군은 본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1,000 마일 떨어진 위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ref>{{Harvnb|Asbridge |2012|p=530}}</ref>
 
13세기는 열광적 신앙심이 민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였고, 그 결과 1212년의 [[어린이 십자군]] 같은 사건도 일어났다. 청소년 및 소년들 여러 무리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른들은 실패했던 성지 탈환이 자신들의 순수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동지중해까지 도달한 어린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사건들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매우 희박하지만, 당시 천명된 대의에 대하여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시사해주는 지표가 된다.<ref>{{Harvnb|Asbridge|2012|pp=533–35}}</ref>
 
[[File파일:Friedrich II. mit Sultan al-Kamil.jpg|thumb|left|알카밀(우측)을 만나는 프리드리히 2세(좌측). [[조반니 빌라니]]의 《[[신연대기]]》 삽화.]]
1217년, 인노첸티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집트-시리아 일대의 살라흐 앗딘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5차 십자군]]이다. 지휘관은 [[헝가리왕]]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 폰 외스터라이히 공작|레오폴트 4세]]였고, 병력은 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 [[프리지아]]에서 모집되었다. 레오폴트와 [[장 드 브리엔]]이 [[다미에타]]를 공격해 함락시켰으나,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간 병력은 격퇴당하여 항복했다.<ref>{{Harvnb|Lock|2006|pp=168–69}}</ref><ref>{{Harvnb|Riley-Smith|2005|pp=179–80}}</ref> 다미에타는 무슬림들에게 반환되었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다.<ref>{{Harvnb|Hindley|2004|pp=561–62}}</ref>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조약을 파기하여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원래는 십자군을 지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 (예루살렘)|이사벨 2세]]와 결혼했기에 예루살렘 왕위를 요구할 수 있었고, 1228년 아크레에 도착했다. 무슬림들에게서 탈환된지 얼마 안 된 [[시칠리아]]에서 성장한 프리드리히 2세는 기독교 군주들 중 무슬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무슬림 근위병을 두고 심지어 [[하렘]]도 가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적 수완에 힘입어, [[제6차 십자군]]은 사실상 무력을 동원한 협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ref>{{Harvnb|Asbridge|2012|pp=566–71}}</ref> 예루살렘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에서 아크레로 이어지는 좁은 영토를 기독교도들에게 넘기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들은 무슬림들이 계속 통제하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 술탄]] [[알카밀]]과 동맹도 맺었다. 이런 조약을 맺는 것은 프리드리히가 이 일대 지역에 어떠한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케 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자기 직할령이 공격받자 프리드리히는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ref>{{Harvnb|Asbridge|2012|p=569}}</ref>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세속 제후들이 종종 원정을 벌였다. 1239년의 [[남작 십자군]]은 [[나바라왕]] [[티발트 1세]]와 [[제1대 콘월 백작 리처드|콘월 백작 리처드]]가 이끌었다. 이 십자군은 무력 외교와 아이유브조의 여러 파벌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음모 공작을 병행 실시했다.<ref>{{Harvnb|Asbridge|2012|p=573}}</ref> 이 때가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였다. 하지만 그 중흥은 어디까지나 알카밀이 죽고 아이유브조가 분열되어 약화된 것에 기인했기에 사상누각과 같았다.<ref>{{Harvnb|Asbridge|2012|p=57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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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의 동지중해의 정치 판도는 여러 세력들이 이해관계로 얽혀 복잡했다. 바이바르스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기독교도들과 몽골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고, 두 번째는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부터 [[노예]]를 수급해 오는 교역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여 바이바르스는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와 외교를 맺고 만프레디가 교황청 및 [[샤를 1세 당주 백작]](루이 9세의 동생)과 대립하는 것을 도왔다.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되었고, 여러 세력이 영향력을 발휘하려 경쟁했다. 한편, [[삽바스 전쟁]]의 결과 경쟁 [[해상공화국]] 제노바로부터 아크레에서 티레에 이르는 영토를 빼앗은 베네치아는 바이바르스의 이집트와 기꺼이 무역했다. 바이바르스는 그러는 동시에 [[니카이아 제국|니카이아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하여 제노바인들의 자유로운 통행도 보장했다.<ref>{{harvnb|Asbridge|2012|pp=628–30}}</ref>
 
[[File파일:SiegeOfAcre1291BNF.JPG|thumb|right|1291년 [[아크레 공방전 (1291년)|아크레가 함락]]되었고, 아크레의 기독교도 시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당주가 비슷하게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샤를은 [[시칠리아]]와 비잔티움의 영토를 탈취하는 한편, 딸들을 라틴계 비잔티움 제위 요구자들에게 시집 보냈다. 1270년, 샤를의 형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예루살렘 왕위를 노리던 샤를은 형을 설득해서 예루살렘이 아닌 [[튀니스]]의 아랍 반군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루이의 십자군은 풍토병으로 초토화되었고 루이 본인도 8월 25일 튀니스에서 죽었다. 루이의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를 비롯한 소규모 수행단만 계속 남아 싸웠는데, 이것을 [[제9차 십자군]]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할 뻔한 뒤 10년짜리 휴전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로써 동지중해 지역에서의 유의미한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ref>{{Harvnb|Asbridge|2012|pp=643–44}}</ref> 1281년 교황 선거 결과 프랑스인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교황청의 모든 권력이 샤를 당주를 뒷받침하는 형국이 되었다. 샤를은 과거 제4차 십자군이 그랬던 것처럼 동로마 황제위를 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십자군을 일으키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배후 조종에 의해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는 대대적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으로 샤를 당주는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고, [[아라곤왕]] [[페로 3세]]가 시칠리아왕을 칭했다. 마르티노 4세는 페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을 토벌하는 [[아라곤 십자군]]을 소집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285년, 지중해 제국을 만들고자 평생을 바친 샤를 당주가 그 모든 노력이 무상하게 사망했다. 루이와 샤를 형제는 자신들을 교황청을 옹위하는 신의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다.<ref>{{Harvnb|Runciman|1958|p=88}}</ref>
 
십자군 원정의 쇠퇴와 십자군 국가들의 파탄의 원인은 상당히 다면적이다. 무슬림 세계의 통일과 열정적 [[지하드]]를 통해 이를 설명하려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토머스 애스브리지]] 등의 학자들은 이것이 너무 단순화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무슬림들의 통합은 산발적이었으며, 지하드에 대한 열정은 간헐적이었다. 그보다 십자군 자체의 본질이 성지 정복과 방어에 적절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개인들의 순례 여행이었으며, 대부분의 십자군은 성지만 찍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십자군의 철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변화했지만, 십자군이 제각기 꿍꿍이가 있는 이들이 동상이몽하는, 중앙집권적 지도부가 없는 일회성 군대들의 집합이었다는 점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십자군 국가들이 국가로서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규모의 상비군이었다. 종교적 열정은 군사적 모험을 촉발시키는 데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지휘통제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어려움을 나타냈다. 유럽에서의 작위 계승 분쟁들, 흉작과 이단 종파의 발생 등으로 인해 라틴 유럽의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싸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터는 유럽의 본거지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는 보급과 통신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카리스마적인 누르 앗딘이나 관대한 살라흐 앗딘, 무자비한 바이바르스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지도자가 세워졌을 때 근접성을 십분 발휘하여 보급상의 이점을 얻었고, 이것이 승리로 이어졌다.<ref>{{Harvnb|Asbridge |2012|pp=660–64}}</ref> 1289년 [[트리폴리 함락 (1289년)|트리폴리]]가, 1291년 [[아크레 공방전 (1291년)|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은 완전히 지워졌다.<ref>{{Harvnb|Lock|2006|p=122}}</ref> 멸망한 십자군 국가의 기독교도들은 [[키프로스]] 같은 섬으로 도망가서 망명정부를 세웠다. 거기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ref>{{Harvnb|Asbridge |2012|p=656}}</ref><ref>{{Harvnb|Tyerman|2006|pp=820–2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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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비 십자군 ===
[[File파일:Albigensian Crusade 01.jpg|thumb|upright=1.35|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알비파(왼쪽 사람들)를 파문하고, 십자군이 알비파를 학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알비 십자군]](1209년–1229년)은 알비파라고도 하는 [[카타리파]]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한 십자군이다.<ref>{{Harvnb|Riley-Smith|1999|p=4}}</ref> 카타리파는 [[프랑스]] 남부에서 상당한 교세를 모으고 있었다. 십자군에게 카타리파는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교세 중심지였던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툴루즈 백작위의 유일한 추정상속인 [[잔 드 툴루즈 여백작|잔]]이 [[루이 9세]]의 남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 백작]]과 결혼했고, 잔과 알퐁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못한 채 잔이 죽자 툴루즈 백국은 [[카페 왕조]]의 직할령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프랑스왕 입장에서 알비 십자군의 실제 동기 중 하나였으리라 짐작된다.<ref>{{Harvnb|Lock|2006|pp=163–65}}</ref>
 
===보스니아 십자군 ===
[[보스니아 십자군]]은 [[보스니아 교회|독립 보스니아 교회]] 토벌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이다. 보스니아 교회는 [[보고밀파]]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물론 헝가리의 영토 확장 야욕도 동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1216년, 보스니아를 개종시키기 위한 사절이 파견되었으나 개종에 실패했다. 1225년 호노리우스 3세는 헝가리인들에게 [[보스니아]]에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이 [[모히 전투]]에서 몽골에게 패배하면서 보스니아 십자군은 실패로 돌아갔다. 1234년 그레고리오 9세가 재차 십자군을 독려했지만 이번에는 보스니아인들이 헝가리인들을 격퇴해냈다.<ref>{{Harvnb|Lambert|1977|p=143}}</ref>
 
=== 레콩키스타 ===
[[File파일:La Rendición de Granada - Pradilla.jpg|thumb|1492년 [[그라나다 조약 (1491년)|그라나다의 항복]].]]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이베리아 기사단이 이합집산하여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산티아고 기사단]]을 형성했고, 이들을 돕는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1212년에서 1265년 사이에 [[무어인]], [[무와히드 칼리파조|무와히드조]] 등 무슬림 세력을 크게 몰아냈고, 교황이 승인한 이베리아 십자군들의 도움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라나다 토후국]]은 1492년까지 존속했지만, 그라나다마저 멸망한 이후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된다.<ref>{{Harvnb|Lock|2006|p=211}}</ref>
 
== 14, 15, 16세기 ==
=== 대 오스만 십자군 ===
[[File파일:NikopolisSchlacht.jpg|thumb|[[니코폴리스 전투]].]]
 
소규모 십자군 시도들이 있던 14세기를 거쳐, 14-15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발칸 반도 정복]]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십자군이 이루어지게 된다. 1309년, 잉글랜드, 프랑스 북동부, 독일에서 30,000 여명의 농민들이 모였으나 [[아비뇽]]까지 가서 거기서 해산했다.<ref>{{Harvnb|Lock|2006|pp=187–88}}</ref> 1365년, 키프로스왕 [[피에르 1세 드 뤼지냥]]이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는데, 이를 [[알렉산드리아 십자군]]이라고 한다. 피에르 1세의 동기는 종교적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인 만큼 경제적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ref>{{Harvnb|Lock|2006|pp=195–96}}</ref> 1390년에는 [[루이 2세 드 부르봉 공작]]이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을 적으로 삼은 [[바르바리 십자군]]을 지휘했다. 하지만 10주간의 공방전 끝에 십자군은 10년 기한의 휴전을 맺고 철수했다.<ref>{{Harvnb|Lock|2006|p=199}}</ref>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오스만 튀르크는 [[발칸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동로마의 영향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한 뼘 밖에 남지 않았다. 1393년에는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시슈만]]이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이듬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서방 교회의 분열]]로 교황 세력이 아비뇽과 로마로 두쪽이 난 와중에도 튀르크족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십자군 소집을 선언했다.<ref name="Davies 1997 448">{{Harvnb|Davies|1997|p=448}}</ref> 이 십자군은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제국)|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지휘했다. 많은 프랑스계 귀족들이 지기스문트의 군대에 합류했으며, 그 중에서 [[장 1세 드 부르고뉴 공작|부르고뉴 공자 장]]이 두각을 드러냈다. 지기스문트는 십자군에게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다뉴브 강]]에 도달한 십자군은 바로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9월 25일 오스만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을 깨뜨리고 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ref>{{Harvnb|Lock|2006|p=200}}</ref>
 
오스만은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했고, 술탄 [[무라드 2세]]가 1444년 [[흑해]] 해변 [[바르나]]에서 [[바르나 십자군]]을 궤멸시켰다. 이 십자군이 교황청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4년 뒤에는 마지막 헝가리인 원정대도 격파되었다.<ref name="Davies 1997 448"/>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동로마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로마를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여세를 몰아 1456년 헝가리로 쳐들어왔고, [[후녀디 야노시]]가 [[베오그라드 공방전 (1456년)|베오그라드에서 농성]]했다.<ref>{{Harvnb|Lock|2006|pp=202–03}}</ref> [[교황 비오 2세|에네아스 실비우스]](훗날의 교황 비오 2세)와 [[조반니 다 카페스트라토]]가 십자군 소집을 선동했고, 신성로마제국의 공후들이 라티스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의회에서 원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결과가 나온 것이 없었다. 1487년 4월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보이아]], [[피에몬테]], [[도피네]] 일대에서 [[발도파]] 이단이 퍼지고 있으니 토벌을 위한 십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중 무언가 행동이 이루어진 곳은 도피네 뿐이었고, 그나마도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ref>{{Harvnb|Lock|2006|p=204}}</ref>
 
이 시기가 되면 지중해 주변에서 오스만에게 유의미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체는 베네치아가 유일했지만, 베네치아의 소위 "십자군"은 어디까지나 상업적 이윤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은 1718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럽 기독교 세계가 무슬림 세계를 최대 가상적국으로 간주하는 것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다.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와 다투면서, 독일의 개신교도 제후들 뿐 아니라 무슬림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였다.<ref>{{Harvnb|Davies|1997|pp=544–45}}</ref>
 
=== 후스 십자군 ===
[[File파일:Hussitenkriege.tif|thumb|upright|1431년 [[도마츨리체 전투]]에서 십자군을 박살내는 후스파 군세.]]
[[후스 전쟁]]이라고도 하는 후스 십자군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진행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지도자 [[얀 후스]]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토벌하려 한 십자군이다. 후스는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15세기 초에 총 다섯 차례(1420년, 1421년, 1422년, 1427년, 1431년)의 대 후스파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이는 서로 교리 차이로 반목하던 후스파의 내부 종파들이 단결하여 침략자 십자군을 격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후스 전쟁은 1436년 끝났지만 천주교회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천주교회는 [[타보르파|급진 후스파]]를 제거하기 위해 온건 후스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교리를 용인해주는 [[바젤 협정]]을 맺어야 했다.<ref>{{Harvnb|Lock|2006|pp=201–02}}</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