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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독립전쟁 선풍이 휘몰아칠 때, 페루는 왕당파의 보루로 남아있었다. 상류층이 해방과 복종 사이에서 주저하였기 때문에 페루의 독립은 [[호세 데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의 원정이 성공한 뒤에야 이루어졌다.<ref>Timothy Anna, ''The fall of the royal government in Peru'', pp. 237?238.</ref> 공화국 초기에 군사 지도자들 사이의 지역적 권력 다툼으로 정치가 불안하였다.<ref>Charles Walker, ''Smoldering ashes'', pp. 124?125.</ref> 볼리바르가 계획한 [[라틴 아메리카 연합]]이 실패하고 [[페루-볼리비아 연합]]이 단명한 가운데, 이 시기에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ref>Paul Gootenberg, ''Between silver and guano'', p. 12.</ref> 184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 페루는 [[라몬 카스티야]] 대통령 하에서 [[구아노]] 수출을 통한 국가 수입 증대로 안정기를 맞았다.<ref>Paul Gootenberg, ''Imagining development'', pp. 5?6.</ref> 1870년대에 이르러 구아노가 고갈되면서 국가는 빚더미에 올랐고 정치 내분이 일어났다.<ref>Paul Gootenberg, ''Imagining development'', p. 9.</ref>
 
[[파일:La Independencia del Perú.jpg|thumb|left|[[1821년]] [[7월 28일]]에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독립을 선포한다.]]
 
1879~1883년 [[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태평양 전쟁]]에서 페루는 칠레에 패배하여, [[리마]]와 [[안콘]]의 조약에 따라 [[아리카]] 주와 [[타라파카]] 주를 잃었다. 전후 내부 다툼이 일어나다 [[시민당]](''Partido Civil'') 시대에 안정을 되찾았으나, [[아우구스토 B. 레기아]]의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끝나고 만다.<ref>Ulrich Mucke, ''Political culture in nineteenth-century Peru'', pp. 193?194.</ref> [[대공황]]으로 레기아는 몰락하고 다시 정치 분쟁이 일어났으며 [[아메리카 혁명 인민 동맹]](APRA)가 등장하였다.<ref>Peter Klaren, ''Peru'', pp. 262?276.</ref> 그러나 이들의 반대파와 상류층-군부의 연합이 서로 대립하면서 이후 30여년간 페루 정계를 주도하였다.<ref>David Palmer, ''Peru: the authoritarian tradition'', p. 9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