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루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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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블랑카 데 카스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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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세 당주'''({{llang|fr|Charles Ier d'Anjou}}:, [[1226년]] [[3월 21일]] –~ [[1285년]] [[1월 7일]])는 [[시칠리아]]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호엔슈타우펜가]]를 몰아내고 자신의 [[앙주카페 가문앙주가|카페 앙주 왕조]]를 세운 [[프랑스]] 출신의 [[시칠리아의 군주|시칠리아왕]]이다. 시칠리아왕으로서는 '''카를루 1세'''({{llang|scn|Carlu I d'Angiò}}), '''카를로 1세'''({{llang|it|Carlo I d'Angiò}})라고 하지만,불린다. [[[카페 왕조]]의 방계인 카페-앙주가 출신의 프랑스 왕족이기에 "샤를 당주"라고 흔히불리기도 불린다한다.
 
[[프랑스의 군주|프랑스왕]] [[루이 9세]]의 동생으로 [[1266년]] 부터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반도 본토의 나폴리 일대를 지배했으며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칠리아|시칠리아 섬]]에서 쫓겨나 [[나폴리]]와 일부 본토만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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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의 생애 ===
샤를 당주는카를로는 [[1226년]] 아버지 [[루이 8세]]가 죽기 직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블랑카 데 카스티야]]였다. 막내로 태어나 다른 형들처럼 봉토를 전혀 받지 못했는데 바로 위의 형 필리페 다고베르트와 장 트리스탕이 죽자 다음 계승자로 1246년에야 봉토를 받을 자격이 생겼다. 그러나 샤를은 야심이 많아서 항상 출세를 호시탐탐 노렸다. [[1246년]]에 그는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여 프로방스의 백작이 되었고, 이때문에 처가 식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 때까지 비교적 자유를 누리던 그 지역에서 보다 강력한 권위를 내세웠기 때문에 이 지역의 봉신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1248년]] 샤를은카를로는 형 루이 9세를 도와 [[제7차 십자군|제7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여 이집트로 갔다. 그는 [[다미에타]] 공격에 가담하는 등 군사적인 도움을 주었으나 형처럼 강력한 신앙심이 없었고 [[1250년]] 프랑스로 돌아와 버렸다. 그가 십자군에 나가있는 사이 본토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는데 샤를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이듬해에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였다.
 
=== 시칠리아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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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는 야심가 ===
샤를은카를로는 [[시칠리아의 군주|시칠리아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안 되어 [[코르푸 섬]]과 [[에피루스]] 해안일부를 점령하여 [[비잔티움 제국]]령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1265년]] 그는 교황 클레멘스와 아카이아의 기욤 공작, [[라틴 제국]]의 폐위된 황제 [[보두앵 2세 (라틴 제국)|보두앵 2세]]와 조약을 맺고 [[라틴 제국]]과 그 주변 국가에 대한 영토확장을 꾀했다. 즉, 라틴 제국의 부활을 돕는 대가로 영토의 3분의 1을 약속받은 것이다. 샤를은 이로써 [[지중해]]의 강자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위를 향하여 야심을 불태웠다.
 
샤를은카를로는 또한 중부 유럽의 군주들과 다방면으로 동맹을 구축하였다. [[헝가리 왕국]]의 [[헝가리의 군주|국왕]] [[벨러 4세]],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슈 1세, [[제2차 불가리아 제국|불가리아]]와 동맹을 맺어 그리스 제국을 압박했고 셀주크 술탄, 아르메니아, 심지어 몽골까지도 접근했다. [[1269년]] 8월에는 그는 제노바와 통상조약을 맺고 비잔티움의 [[미카일 8세|황제 미카일 팔리이올로구스]]를 고립시켰다.
 
[[1270년]] 샤를은카를로는 형 루이 9세가 참가한 [[제8차 십자군|8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해 8월 형 루이가 죽고 십자군의 수장이 되어 튀니스의 아미르와 평화조약을 맺고 시칠리아로 귀환했다. 그러나 귀환길에 유례없는 폭풍우를 만나 18척의 대형선박을 잃고 몇시간만에 시칠리아의 육군과 해군은 괴멸했다.
 
[[1271]]년에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십자군 전쟁|9차 십자군]]을 결성하여 아크레로 진격해 맘루크 왕조와 싸웠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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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비잔티움은 교황과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했다. 이 때문에 샤를의 비잔티움 공격은 교황의 반대를 받았고 미카일 황제는 알바니아의 시칠리아 왕국 영토를 공략해서 일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칠리아와 비잔티움의 소규모 접전 상태는 수년간 계속 되었는데 [[1280년]] 샤를은 쉴리의 붉은 머리 장군 우고에게 [[기병]] 2천명이 포함된 약 8천의 병력을 주고 알바니아를 공략하게 했고 베라트에서 공방전을 폈다. 베라트는 완강히 전항했고 이듬해 3월 비잔티움 제국의 구원군에 의해 시칠리아 군은 패배했다.
 
샤를의카를로는 비잔티움 공격계획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는데 [[1281년]] 2월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즉위하면서 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마르티노는 프랑스 출신으로 샤를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교황의 지지를 받은 샤를은 비잔티움과 관계가 소원해진 [[베네치아 공화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해로를 통한 비잔티움 원정을 계획했다. 교황은 이 원정을 [[십자군]]으로 격상시켰고 샤를은 당대 유럽의 최강의 군주로 부상했다.
 
=== 시칠리아 상실 ===
그러나 시칠리아에서는 샤를의카를로의 앙주카페 가문에앙주가에 대한 반감이 점차 고조되었다. 대 비잔티움 전쟁수행을 위한 중과세와 가혹한 압제로 반란의 기운이 일어났고 특히 [[아라곤 왕국|아라곤]]의 [[아라곤의 페드로 3세|페드로]]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디|만프레디]]의 사위로 자신이 적법한 [[시칠리아의 군주|시칠리아 왕위 계승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시칠리아의 반란을 배후에서 조장했다.
 
{{본문|시칠리아 만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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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곤과의 전쟁과 죽음 ===
본토로 퇴각한 샤를은카를로는 교황과 [[프랑스의 군주|프랑스 왕]]인 자신의 조카 [[프랑스의 필리프 3세|필리프 3세]]를 통해 아라곤에 대항했다. 교황 마르티노는 아라곤의 페드로를 파문했고 아라곤군은 [[몰타]]를 점령했다. 양측의 전쟁은 이탈리아 본토와 여러섬에서 계속되었고 샤를은 아들 [[샤를 2세 당주|샤를 르 브와테]]에게 이탈리아 방위를 맡기고 자신은 프랑스로 가서 군대를 일으켜 아라곤 본토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아라곤의 루지에로 제독은 시칠리아의 함대를 이끌고 [[나폴리]]를 봉쇄했는데 샤를 2세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함대를 출항시켰다가 [[1284년]] [[6월 5일]] 루지에로의 아라곤 함대에 대패하였고 그 자신도 아라곤의 포로가 되었다. 이 결정적인 패배로 샤를은 [[칼라브리아]]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고 반격을 준비하던중 [[1285년]] [[1월 7일]] 포키아에서 죽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권한과 왕위를 당시 [[카탈루냐 지방|카탈루냐]]에 포로로 잡혀있던 아들, 샤를 2세에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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