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이 나오유키 (181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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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가에이]] 6년, 막부로부터 감독관으로 등용된다. [[1854년]] [[안세이]] 원년에는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총감(소장)으로 [[나가사키]]에 가서, [[나가사키 제철소]]의 창설에 착수하는 등 활약했다. [[1858년]]에 그때까지의 공적으로 상을 받게 되었고, 소환되어 [[이와세 다다니리]]와 함께 [[외국 봉행]]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협상을 맡아 통상조약 체결했다. 그 공적으로 [[군함 부교]]로 승진했지만, 직후 장군 후계자 다툼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히토쓰바시 파(一橋派)에 속했기 때문에, 난키 파(南紀派)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파면되고 실각했다.
 
나오스케 사후인 분큐 2년 [[1862년]], [[교토]] 정봉행으로[[정봉행]]으로 복귀하였고, [[겐지]] 원년인 [[1864년]]에 대목부(大目付, 감독관)이 된다. [[1863년]] [[8월 18일의 정변]], [[1864년]] [[7월 19일]] [[금문의 변]]에서는 막부 측의 사자로서 조정과 협상하는 등 협상 능력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1867년]]에는 [[와카도시요리]](若年寄)까지 출세한다. [[대정봉환]]에서도 협상 능력을 발휘했다.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쇼군 요시노부를 따라 에도로 도망쳐 돌아온 다음에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함께 [[에조치]]로 갔다가, [[하코다테 봉행]]이 되어 신정부군과 싸웠다. 그러나 패배해 다케아키와 함께 자결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