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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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llang|ja|平安時代|へいあんじだい|헤이안지다이}}, [[794년]]~[[1185년]])는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 390년간을 지칭하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교토 시|교토]]에 세워진 [[헤이안쿄]]가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까지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나라 시대에 율령정치가 시작되어 헤이안 초기에는 [[일본 천황|천황]]의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승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후지와라씨]] 정권에 의한 부패가 횡행했다. 정치에 불만을 가진 하급귀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들이 설치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이들을 제압하려 커진 정치세력이 무사 계급이다. 귀족들을 대신해 무사의 정치가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은 다음가마쿠라 시대로막부부터 에도 막부시기까지 700년동안 이어졌다.
 
일본 역사상 [[모노노케]], [[음양사]]를 비롯한 미신이 성행한크게 시대이기도성행한 하다시대이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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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
대륙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사절과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에 안전한 신라쪽이었다.<ref>{{서적 인용 |저자=박복원 |제목=일본정보뱅크 |연도= 2004 |출판사=백산출판사 |위치=|id=ISBN 89-7739-627-1 |쪽= 136 |인용문 = 그러나 대륙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사절과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에 안전한 신라쪽이었다. }}</ref> 마침내 799년 일본은 신라사(新羅使)의 파견을 중단하였다. 당시 일본은 [[발해]]와는 계속 왕래해도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803년 7월에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 三國史記/卷10|본기 권10 애장왕]] |인용문=  哀莊王… 四年 … 秋七月 與日本國 交聘結好 (애장왕…4년(803) 가을 7월에 일본국과 서로 사신을 교환하여 예방하고 우호를 맺었다.) }}</ref> 다음 해 5월에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 三國史記/卷10|본기 권10 애장왕]] |인용문=  哀莊王… 五年 … 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黄金三百兩 (애장왕…5년(804) …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ref> 했으며, 882년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헌상했다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 三國史記/卷11|본기 권11 헌강왕]] |인용문=  憲康王… 八年 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 明珠一十箇 (헌강왕 8년(882)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ref> 한다. 그러나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을 정지한 터에 황금을 바쳤다는 것은 신뢰하기 힘들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9세기 이후 정상화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아전인수라는 주장도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김성호, 김상한 |제목= 한중일 국가기원과 그 역사 |연도= 2008 |출판사=맑은소리 |위치=|id=ISBN 978-89-8050-221-9|쪽= 262 |인용문 = 그 후 『일본후기』연력 18년(799) 5월 29일자로 일본은 “사신의 신라 파견을 정지했다(停遣新羅使).” 당시 일본은 일본을 상국으로 받드는 발해와는 계속 왕래해도 대등외교를 표방하는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런데도 「신라본기」엔 제40대 애장왕 4년(803) 7월에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 다음 해 5월에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했으며, 제43대 헌강왕 8년(882)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헌상했다” 한다. 그러나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을 정지한 터에 왜 황금을 바쳤겠나. 따라서 신라사의 권위 신형식이 나일 관계가 “9세기 이후 정상화되었다”<sup>235)</sup>는 주장은 신라와 일본의 쌍방기록을 대조하지 않고 「신라본기」만 본 아전인수다. ... 235) 申瀅植, “統一新羅의 對日關係”, 『統一新羅史 硏究』, 三知社, 1990 }}</ref> [[당나라|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군함 이야기| 저자= [[허홍범]] |판= |연도= 2006 |출판사=좋은책만들기 |쪽= 82 |id=ISBN 89-89222-93-1|인용문= 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ref> 926년 발해가 멸망하게 되자 쇄국 정책을 피게 된다.
 
==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