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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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ref name="yi59">이상해, 59쪽.</ref>
 
[[인조 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 25년 [[1647년]]에1647년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한편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숙종 30년(1704년)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조선 정조|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창덕궁 부용정|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에는1907년에는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즉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 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과 그 앞의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개조·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