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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는 1955년 6월 28일에 [[전라남도]] [[영암군|영암]]에서 4녀 중 4녀로 출생하였으며 [[부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에서 잠시동안 유년기를 보내다가,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어릴 적부터 워낙 노래를 잘 하기로 그 명성이 자자하여서 하춘화의 노래실력을 일찍이 알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하춘화를 가요계에 입문시켰다. 그리하여 하춘화는 1961년 만 6세에 8개월 동안 서울 동아예술학원 가요과를 수료한 뒤 데뷔곡《효녀 심청 되오리다》(오종하 작사/형석기 작곡)가 수록된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당시 그녀는 불과 만 6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에서 최연소로 데뷔한 것이였고 당시 기준 세계 최연소 음반 출반 가수로 추정된다. 하춘화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줄곧 따라다니면서 매니저 역할을 하며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도록 도왔고 데뷔한지 5년 만인 1966년에 《아빠는 마도로스》가 처음으로 히트하였다.
 
하춘화는 17세가 되던 [[1971년]]에1971년에 정규 1집 음반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데뷔해 정식 가수가 되었다. 1집 음반의 타이틀곡이였던 정통 트로트《물새 한마리》(이용일 작사/ 고봉산 작곡) 가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 성인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가요계를 이끌게 되었다. [[1972년]]에1972년에 가수 겸 작곡가였던 [[고봉산]]과 신민요《잘했군 잘했어》(원작: 이고범/ 개작: [[반야월]]/ 작곡: 고봉산)를 듀엣으로 불러 TBC 동양방송에서 여자가수상을 4년 연속으로 수상하며 불과 18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톱 가수로 성장했다. 그 해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만들어 아리랑의 맥을 이어나간 신민요 《영암 아리랑》(작사: 백암/ 작곡: 고봉산)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 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발돋움 하였다.
 
공식 데뷔 이후 한창 상승세를 타던 하춘화는 1970년 대에 접어들며 신민요 이외에도 정통트로트《알고 계세요》(작사: 정두수/ 작곡: [[박춘석]]), 팝 스타일이 돋보이는 곡《숙녀 초년생》(작사: 이희복/ 작곡: [[박춘석]]), 빠른 템포의 리듬의 곡《난생 처음》(작사: 고향/ 작곡: 남국인),《우리 사이》(작사: [[박춘석]]/ 작곡: [[박춘석]]) 등 여러 곡들을 히트시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고 최고의 경지까지 올라가 1970년 대의 인기가수로 등극한다. [[1974년]]부터1974년부터 자신만의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에 영화 숙녀 초년생에서 [[남진]]과 함께 주연으로 열연하여 영화계에도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7년]] [[11월 11일]]에11일에 [[이리역]]에서 공연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열차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어 약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 중에 하춘화와 [[이주일]]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때문에 한동안 가수로서의 활동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1979년]] [[3월 27일]]에27일에 하춘화는 [[경남대학교|경남대]]에서의 학업과 결혼 준비로 인하여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 후 학업에 열중하던 하춘화는 은퇴 선언 2년 만인 [[1981년]]에1981년에 가수로 복직하였는데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놓지는 않았다고 한다. 가수로 복직한 뒤에는 슬픈 감정과 느린 템포의 곡《우리 사랑 가슴으로》(작사: 이성만/ 작곡: 이범희)가 히트하였고 [[1983년]]에1983년에 자신의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이로인해 대중들로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가수였던 하춘화는 [[1985년]]에1985년에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시 남측 여자가수 대표로 3박 4일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직할시|평양]]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 하춘화는 [[1989년]]에1989년에 발표된《날 버린 남자》(작사: 박정환/ 작곡: 박성훈)가 국민들에게 대중적으로 널리 인기를 얻으며 또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1991년에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 [[1992년]]에는1992년에는 대중 가수로서는 세 번째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인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던 하춘화는 [[2002년]]에는2002년에는 빠른 템포의 트로트《연하의 남자》(작사: 김홍조/ 작곡: [[박현진]])를 부르며 활동할 당시 자신만의 댄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학업에도 열중하여 [[1994년]]에1994년에 [[고려대학교|고려대 자연자원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을 수료하고 나서 [[1998년]]에는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한국방송통신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였다. [[2000년]]에는2000년에는 [[동국대학교|동국대 대학원]]에서 《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공연예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지난 [[2006년]] [[8월 25일]]에25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박사 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되었다.
 
하춘화는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공식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7년]]부터2007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2012년]]에는2012년에는 [[이호섭]]과 함께 부른 휘뚜루 마뚜루를 발표하였다. 이는 30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듀엣 곡이다. 하춘화는 만 6세라는 어린 나이에 활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부른 취입곡은 [[이미자]], [[나훈아]] 다음으로 가장 많은 약 2,400 여 곡 정도 추정되며, 드라마 주제가는 약 60여곡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꾸준히 많은 무대와 공연에 참석하여 현재 8,500회의 공연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녀는 명실상부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며 50여년의 긴 활동기간과 박사 학위를 가졌다는 독특한 이력 또한 대중의 이목을 끌고 있다. [[2011년]]에는2011년에는 데뷔 50주년을 맞아하춘화와 함께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이 콘서트에서 벌어들인 200억원을 불우이웃 돕기에 기부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다. 최근에는 데뷔 55주년 기념 나눔·사랑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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