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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어머니는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이기(李锜)의 시첩(待妾)이었던 정씨(鄭氏)로, 이기가 모반죄로 처형된 뒤 궁에 들어왔다가 귀비(貴妃)로 책봉되었고 선종을 낳았다. 광왕(光王)에 봉작된 뒤 십육택(十六宅)에서 살면서 짐짓 어리석은 체 하며 살았는데, 때문에 당시 문종이나 다른 황족들은 그가 정말 어리석은 줄만 알고 자주 그를 업신여겼다고 한다. 즉위하기 전 출가해 중이 되어 하남(河南)의 절천(淅川)에 있던 향엄사(香嚴寺)라는 절에 피신해서 법명을 양준(琼俊)이라 하였는데, 절에 있던 승려 제안(濟安)이 선종의 거동을 알아보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송고승전》).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등은 이러한 선종의 행동을 당시 선종의 존재를 황위에 대한 잠재적인 라이벌로 여겨 그를 제거하려 했던 조카 무종을 피해 출가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근거는 없으며, 당시 수많은 서출(庶出) 황족의 한 사람이었던 선종이 과연 무종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라이벌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학자도 있다.
 
[[회창]](會昌) 6년([[846년]]), 평소 도교를 신봉한 무종이 금단을 남용한 나머지 위독해진 상태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환관]](宦官) 마원찬(馬元贄)에 의해 이례적으로 황태숙(皇太叔)으로 옹립된 선종은 무종이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이름을 에서이에서 침으로 바꾸었다.
 
선종을 옹립한 마원찬 등의 환관들은 어리석은 선종의 모습만 기억하고 그가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판단해 황제로서 옹립했지만, 황제로 즉위한 뒤 감추고 있던 본연의 총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선종은 쇠퇴한 국세를 재건하고자 배휴(裴休)를 기용하고 내정에 힘을 쏟았다. 새로운 연호를 대중(大中)으로 선포하고, 무종조에 중용되었던 이덕유 일당을 배제하고 우승유(牛僧孺) 일파를 억제하는 등 중신들에 의한 파벌 싸움(우이당쟁牛李堂爭)이나 환관 세력의 소멸을 꾀하는 동시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에 대해서도 온건한 견제정책을 채용하는 등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무종 시대에 발호되었던 폐불령을 거두고 [[불교]]를 보호하는 시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선종은 당시 [[토번|티베트]](吐蕃), [[위구르]](回纥)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병사를 보내 하황(河湟) 땅을 차지하는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