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전투 (195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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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및 영향 ==
{{참조|임시 수도 강계}}
사실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할 때부터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기관]], [[부대]], [[수뇌부]]가 평양에서 철수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10월 9일부터 [[평양 철수]]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는데 그 중 일부 인민군은 [[만주]]의 [[하얼빈]]이나 [[중국]] 국경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김일성]] 역시 10월 12일에 [[평양]]에서 [[덕천]]으로 피했다가 [[임시 수도 강계]] 근처로 도망가고 없는 상태라 이미 평양은 텅 빈 거리와거리나 사실상 마찬가지였다. 평양을 점령했지만 미국이 평양 통치권을 실행했는데 이는 트루먼 대통령 쪽에선 38선 이남만 대한민국 통치가 가능하고 평양은 별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UN군사령부는 평양에 군정을 실시할 준비를 하였으며, [[10월 21일]]에 맥아더 원수는 [[평양 비행장]]에 비래하여 미군 중 제1착을 한 제5기병연대의 F중대 등 미군을 사열하였다.
 
유엔군은 계속 북진하여 미 제1군단은 [[신의주]]-[[수풍댐]] 지역으로 계속 북진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제1사단은 [[수풍댐]]을 목표로, 미 제24사단은 [[선천]]으로 진격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