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 항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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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일]] ===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와 [[민주정의당|여당]]은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어서 6.10 대회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시위사태에시위 대처방안을사태에 대처 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사회혼란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했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3_6035.html|제목 = [명동시위]고위시국대책회의, 시위 대책 논의[김석진]|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한편 명동성당은 별다른 충돌 없이 결혼식과 미사가 예정대로 열리는 등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팽팽한 긴장은 계속되었다.<ref name="ReferenceC">{{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7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농성 나흘째, 결혼식 및 미사 거행[정태성]|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성당을 점거하고 있는 350여 명의 시위 농성자들은 오전 9시와 11시 50분 두 차례에 걸쳐 경찰저지선 50m앞까지 진출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ref name="ReferenceC"/> 하지만 농성자들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않아 서로가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ref name="ReferenceC"/> 평화적인 모습이 계속되었으나 점거학생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연행, 구속된 사람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오후 2시부터는 서울지역 200여 명의 사제 신부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대책회의를 열고 학생들을 지지하고 보호하겠다는 전날의 성명을 재확인했다.<ref name="Referenc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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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은 오전 한때 성당 입구 밖으로 나와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10시 20분 이후부터는 문화관 대강당에서 시국 토론회를 가졌으며 신도들은 오전 7시 미사를 비롯해서 예정된 휴일 미사에 참가했다.<ref name="박광온1">{{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38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점거농성 5일째,명동 일대 산발시위[박광온]|저자 = MBC뉴스|날짜 = 1987년 6월 14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오전, 오후 미사가 끝난 뒤에 성당 광장에서 한때 연좌시위가 있었으나 충돌없이 곧 해산했다.<ref name="박광온1"/>
 
그 날 오후 명동성당 주변에 모여든 서울시내 대학생 2000여 명은 상업은행 본점, 롯데쇼핑, 사보이 호텔, 중앙극장 그리고 퍼시픽 호텔 앞 등 명동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ref name="박광온1"/>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 발사를 자제했으며, 시위대 역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아 이전과 같은 격렬한 시위 양상은 없었다.<ref name="박광온1"/> 김병도 명동성당 주임신부는주임 신부는 성명을 낸 뒤,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노력에 성원을 보내지만 교회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에서 학생들과 뜻을 같이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직장과 학교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가 달라'라고 권고했다.<ref name="박광온1"/>
 
=== [[6월 15일]] ===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던 농성자들은 사제단의 뜻을 받아들여 해산했다.<ref name="박광온2">{{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64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농성 6일만에 자진 해산[박광온]|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5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그들은 오후 1시 30분 농성을 해산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고, 오후 2시 성당 입구에서 해산식을 가졌다.<ref name="박광온2"/>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지역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고, 특히 서울의 경우 명동을 비롯한 시내 일부 대학에서 명동사태를명동 사태를 지지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됐고 부산, 대전, 대구 등 일부 지방에서도지역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ref name="박광온2"/>
 
=== [[6월 16일]] ===
명동성당 점거 농성에 이어 시위가 계속 되어 경남 진주에서는 파출소 4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ref name="강성구1">{{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0_6035.html|제목 = 지방 산발 시위, 57개 대학 4만여명[강성구]|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치안본부에치안 본부에 따르면 당일 전국 57개 대학에서 4만여 명이 교내 시위를 벌였는데 주로 부산과 진주, 대구 지방에서지역에서 과격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ref name="강성구1"/> 그리고 10일 당시 구속되었던 사람들을 석방하겠다고 밝혔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1_6035.html|제목 = 검찰과 경찰, 6.10 구속자 대폭 석방[문철호]|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
 
그러나 시위가 계속되자 서울교육대학교에 대해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2_6035.html|제목 = 서울교육대학 무기한 휴업령[유기철]|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