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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12사건]] 뒤로 전국에 몰아친 공산당원에 대한 탄압으로 중공 지도부가 분열하는 중에 [[1929년]] [[왕밍]] 등이 [[광저우]]에서 일으킨 [[28인의 볼셰비키]] 봉기의 배후로 지목받고 당내 지도부로터 다시 공격 받았다. [[1930년]] [[코민테른]]은 이를 중재하여 취추바이의 중공 주모스크바 대표직을 철회하였고 취추바이는 같은 해 8월 모스크바를 떠나 [[상하이]]로 귀국했다. 그러나 [[1930년]] 9월에는 [[리리싼]]이 [[코민테른]]으로부터 '좌경 모험주의(左傾冒險主義)'로 비판을 받았으며 취추바이는 다시 동조자로 몰려 비판을 받았다.
 
1931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중공 중앙 전체회의에서 취추바이는 [[리리싼]]과 함께 중앙 최고위에서 물러났으며 총서기는 [[왕밍]]이 맡았다. 얼마 후, [[샹중파]]의 공산당 지도부 봉기 실패와 경찰 [[체포]] 뒤는 [[왕밍]]이 중공 주모스크바 대표로 소환되었고 [[보구]]가 대리 총서기를 맡았다.
 
취추바이는 절치부심하며 [[상하이]]에서 [[1931년]] 이후는 지하 좌익 작가 연맹의 지도자 중 하나가 되어 문학 예술계에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작업을 지도하였으며, [[국민 정부]]의 시장 경제를 활용해 [[중국 공산당|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진지를 [[국민 정부]] 통치 지역에 확장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이 기간 [[루쉰]], [[마오둔]] 등도 [[상하이]]에서 그에 지도급으로 가담한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작가들이다. 취추바이는 [[한자]]를 폐기하고 [[소련 공산당|소련]] 학자들과 함께 알파벳 자모음으로만 중국말을 표기해 쓰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1934년]] 2월 [[마오쩌둥]]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장시 해방구]]로 들어갔으며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중앙 집행위원과 교육부장을 맡았다. 홍군(紅軍)의 [[장정]]이 시작될 무렵에는 [[장시성]] 후방 전선을 호위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선전 부장이 되어 유격전을 지원하였다. [[결핵]] 치료 차 [[상하이]]로 피신 중에 [[1935년]] 4월 유격전에 참여했던 포로의 누설로 [[국민혁명군|중화민국 국군]]에 붙잡혔으며 국민 전향을 거부하였다. 수감 중에 6월에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