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시 카트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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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ssi-Kaatra-1903.jpg|thumb|300px|1903년의 쾨시 카트라.]]
'''쾨시 카트라'''({{llang|fi|Kössi Kaatra}}: 1882년 11월 6일-1928년 11월 15일)는 [[핀란드]]의 언론인, 시인, 연극감독다연극감독이다. 원래 이름은 '''구스타프 아돌프 린드스트룀'''({{llang|fi|Gustaf Adolf Lindström}})이고, '''쾨시 린드스트룀'''({{llang|fi|Kössi Lindström}})으로 개명했다가 다시 개명했다.
 
[[라흐야]]의 소매상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트라의 부친은 알코올중독자였으며, 사실상 모친 혼자 기르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890년대에 가족이 [[탐페레]]로 이주하여 학교를 다니면서 신문팔이, 인쇄공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 변호사가 되어 법무법인에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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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혁명]] 당시 [[오울루]]에 살고 있던 카트라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오울루 지역 노동자잡지인 [[칸산 타흐토]](인민의 의지)에 투고했다. [[핀란드 내전]] 때 [[백핀란드|백군]]이 오울루를 점령하자 카트라는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토르니오]]를 통해 [[스웨덴]]으로 도피했다.
 
1918년 [[스톡홀름]]에 정착하여 오울루에서 썼던 시들을 모아 1922년 시집을 냈다. 《적과 백》, 《어머니와 아들》 등 사문문학도산문문학도 썼다. 카트라는 스톡홀름의 핀란드인 햐웅회 서기를 지내며 핀란드와 미국의 노동운동 계열 신문에 글을 계속 투고했다. 그 과정에서 M. 퇴르매(M. Törmä), MT, 헨키파토(Henkipatto), 퇼린미에서(Töllinmies), 푸니키(Punikki)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이후 여생을 [[예탈란드]]에서 보내다가 39세로 결혼했다. 1928년 스톡홀름 [[후딩게]]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