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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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파일:Yun Bo1Posun 1.jpg|thumb|left|200px|[[대통령]] [[윤보선]]<br />민주당 신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던 그는 군사 정변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묵인한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에 나오며 하야를 선언하였다. [[대통령]]인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고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