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현 (기업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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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성시|개성]] 출신이다. [[한성부]]의 [[남대문시장]]에서 [[육의전]] 중 하나인 [[백목전]]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한 대표적인 어용 상인이었다.
 
[[1905년]] 내장원사로 임명되어 [[남대문시장]]의 전신인 [[선혜청]]의 창내장(남대문시장)에서창내장에서 세금을 걷는 일을 담당했다. [[1906년]] [[대한천일은행]]의 주주, [[1907년]] [[호남철도주식회사]] 정리위원, [[1908년]] [[동양화재보험주식회사]] 발기인, 주식회사한일은행 감사역, [[1909년]] [[대한운수회사]] 회계장 등을 지냈다.
 
이 무렵 [[한일 병합 조약]]의 체결을 위한 각종 운동을 벌이던 [[일진회]]의 회계도 맡았다. 김시현은 일진회의 한 축인 [[송병준]]과 특히 절친한 관계였다. 1908년 [[이토 히로부미]]가 개성을 방문할 때 동행하여 필요한 물품과 경비를 전담하는 등 [[통감부]]와도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이듬해에는 역시 한일 병합 찬성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단체인 [[국민연설회]]의 간사원을 맡았고, 일진회 회계 자격으로 청원비 10만원을 들고 도일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일진회가 해산될 때 해산비 1천원을 받았다. 이 금액은 일진회 부회장 [[김택현 (일진회)|김택현]]이 받은 금액과 동일한 것으로, 김시현의 일진회 내에서의 위상이 높았음을 시사한다. [[1911년]] [[조선농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았다가 그해 사망했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