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59번째 줄:
[[중일전쟁]](1937년~1945년)이 격화되면서, [[일본 육군]]은 베트남으로부터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로의 물자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에 진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는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었고, [[나치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Jean Decoux) 장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ref name="론리"/>{{Rp|19}} 1940년에 일본군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에는 베트남 남부에도 진주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버어마, 말레이 반도, 인도에 있던 [[영국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군사 행동을 위하여 베트남의 천연 자원이 꼭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 지역의 전략적 입지와 천연 자원을 이용하고자 했던 일본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프랑스 정부에게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맡겼다. 일본 점령에 항거하는 활동을 펼친 유일한 단체는 [[베트남 독립동맹(회)]]([[비엣민 또는 베트민, 월맹(越盟)]])이었다. 1941년에 [[비엣민]]이 호찌민의 지도 아래 통합되었다. 호찌민은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였다.
 
일본군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존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까지만 지속되었다. [[비엣민]]의 공격이 계속되고 드쿠 정부가 일본에 맞설 계획을 세우던 1945년 3월,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몰락하자, 일본은 프랑스와의 공동통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프랑스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군대 및 관리 모두를 감금했던 것이다. 즉, 일본군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실행하여 프랑스군을 제압하여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세우고, 아예 드쿠 정부로부터 베트남을 독립시켜 자신의 꼭두각시 정부로 만들려고 했고,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와 적대하는 일본군에 협력했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일본의 지원을 받는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고 명목상에 불과한 꼭두각시 정부인 [[베트남 제국]]이 수립되고, [[바오다이]]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당시의 일본 군인 중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기외후(畿外侯)를 베트남 제국 황제를 세우려고 했지만, 남방군(南方軍)이나 제38군은 베트남의 새로운 정권에게 불간섭의 방침으로 군정의 실시나, 친일 정권 건설을 배제하는 걸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다이는 독립한 베트남의 최초의 원수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안남과 통킹을 프랑스 보호구역으로 내준 1883년 조약을 폐지했다. 이 때 일본에 의한 미곡수탈과 산업용 작물 생산을 강요한 정책, 홍수, 제방 파손으로 인해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고, 그 결과 북부 베트남 1천만 인구 중 2백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ref name="론리"/>{{Rp|20}}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고, 베트남 제국도 1945년 8월 무너졌다.
 
[[비엣민]]은 베트남 8월 혁명으로 빠르게 권력을 탈취하고 임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를 설립하였다. 일본은 베트남의 행정권을 [[비엣민]]에게 넘겼다. 비엣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임시정부를 선언하였다. 8월 30일에 [[후에]]의 궁전에서 베트남 제국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는 퇴위하였다.<ref>이로써 143년 간 베트남을 통치했던 이르는 [[응우옌 왕조]]는 명목상으로도 멸망하게 된다.</ref> 9월 2일, 일본이 도쿄 만의 정박중이던 미주리 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여 전쟁이 종결됨과 함께, [[비엣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ref>[http://coombs.anu.edu.au/%7Evern/van_kien/declar.html Declaration of Independence,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 Vietnam Documents</ref> 그러나, [[포츠담 회담]]의 결과와 연합군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베트남은 중국과 영국에 의해 다시 분할점령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같은 시기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인과 일본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이공에서 식민군을 재결성하여 비엣민 세력과 충돌이 일어났다. 1945년 프랑스임시정부(the Provisional French Republic)는 원래 일본의 점령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된 프랑스 극동 원정군(the French Far East Expeditionary Corps)을 베트남에 보냈다. 이는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고 프랑스의 지배를 재건하기 위함이었다. (→[[비엣민]]·[[베트남 제국]]·[[베트남-프랑스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