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민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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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 봄, 당시 한조(전조)의 왕이었던 [[유총]]에 의해 서진 회제가 처형되었고 이 소식이 장안까지 닿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 이후 삼촌(회제)에 대한 상을 치르고, 진 민제로서 황위에 올랐다. 그때 장안의 상태는 총 가구 수가 100호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사용 가능한 마차 역시 넉 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관리들이 사용할 도장과 피복까지 부족한 상황이었다. 군사력 부문은 국윤(麴允)과 삭침(索綝)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민제는 진주(秦州; 지금의 [[간쑤 성]] 동부 지역) 에 그때까지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마보]](司馬保)를 남양왕(南陽王)에 봉하고, 양쯔강 유역 및 남쪽에 상당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동진 원제|사마예]]를 낭야왕(琅邪王)에 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마보와 사마예는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314년]]경, 한조는 장안을 급습했고, 그 공격 자체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는 민제 정권하의 서진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도 힘이 부족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주(涼州; 지금의 간쑤 성 중부, 서부 지역) 태수인 장궤(張軌)가 약간의 군사를 파견하여 장안을 잠시 도왔다. [[315년]], 사마보는 민제를 돕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삭침 역시 황제가 사마보에게 이용을 당할까 우려되어 황제를 사마보에게 보내지 않았다.
 
[[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인 [[유요 (전조)|유요]]가 민제의 영토에 대규모 침공을 해왔으며, 북지(北地; 현재의 [[산시 성 (섬서성)|산시 성]] [[퉁촨]] 지역)의 비밀기지가 함락되면서, 관중에 있었던 다른 도시들도 붕괴되었다. 구원군이 두 곳에서 도착했지만, 유요군과 맞서기를 주저했다. 결국 유요는 장안을 포위할 수 있었고, 장안의 식량이 바닥날 즈음, 민제는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 민제는 이후 유요에 의해 전조의 수도인 평양(平陽; 산시 성 [[린펀]] 지역)으로 압송되었다.<ref name="z2"> 《[[진서]]》 권5 帝紀第5 중 愍帝紀 {{위키문헌위키문헌언어-줄|:zh:|晉書/卷005|진서 권5 제기제5 중<br />민제기}}</ref>
 
== 전조에서의 생활과 죽음 ==
 
당시 전조의 군주였던 [[유총]]은 사마업을 회평후(懷平侯)에 봉했다. [[317년]] 초, 연회에서 [[유총]]이 사마업에게 하인 노릇을 시키는 등 굴욕을 주었다. 당시 전조에 대한 여러 봉기가 있었는데, 황태자 [[유찬 (전조)|유찬]](劉粲)을 대신해 진 황제를 다시 옹립하려는 목적이었으므로, [[유찬 (전조)|유찬]]은 사마업의 처형을 건의하였고 [[유총]]은 이를 받아들여 사마업을 처형시켰다. <ref name="z2"/>
 
== 각주 ==
{{각주}}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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