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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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 ==
=== 공소장 ===
1945,8,15 해방 직후인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으로 일하다가 그후 [[남로당]] 선전책으로 암약하던 임영춘의 권유로 건준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선전부원으로 있으면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활동하다가 10월경 건준과 목포청년동맹이 해체되자 당시 신민당(후에 공산당 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 목포시 당위원장이며 그후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집단인 민주청년동맹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6,10.1 위 지부원 등이 목포경찰서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파출소를 방화한 폭동사건 배후조종혐의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다가 당시 한민당 목포시당부위원장이던 전처 망 차용수의 망부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고 1949,1 보도연맹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중 4월경 신안군 임자면 출신으로 남로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 지하에서 암약중이던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사실로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되어 10여일간 구속조사를 받던 중 당시 해군 목포 헌병대장이던 박성철(현 경호담당 차장)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고 1967.5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여관 등에서 북괴로부터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야당인 신민당 입후보자가 되어 다수당선되도록 김대중 등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의도적으로 접근한 소위 임자도 거점 간첩 정태묵을 2회에 걸쳐 접촉하여 그로부터 6,8 선거는 관의 금력에 의한 관제선거가 예상되므로 투표직전까지 선거조직을 노출시키지 말것, 여당이 금력공세를 가하면 효력이 감소될 때 까지 방임할 것, 선거시에는 관을 자극하는 언동으로 탄압을 유도하여 동정표를 얻도록 할 것, 선거운동을 도심지보다 변두리에 집중할 것, 여당의 금력 공세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거를 포착하여 여론에 호소할 것, 지방발전만을 외치는 여당의 전략에 말려들지 말것 등 선거전략을 교도받는 동시에 목포산정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종사하던 위 정태묵의 처의 동료교사인 임자도 출신 성명미상을 그 운동원으로 소개받고 동 선거전략에 따라 선거운동을 하여 당선되고 1970.9.29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7대 대통령후보로 지명받게 되자 시국관을 표명한다는구실로 지방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사전 선거유세를 통하여 "정부는 남북간의 군사적 우열에만 집착하여 의도적으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있다" "향토예비군을 조직하여 수백만 국민을 정치적 군사조직으로 묶어놓았다" " 남북간 긴장완화를 위하여 김일성과 대담할 용의가 있다" 라고 주장하는 등 북괴의 위장 평화통일 선전활동에 동조하고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낙선되자 시국을 관망하다가 1972.10.11 지병인 관절염 치료를 구실로 도일 체류중 18일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갖고 반한 반정부 교포 및 미,일 조야의 용공인사들의 지원을 받아 소수교포의 불만을 마치 대한민국 국민의 의사인냥 선전하여 미국 일본 등 우방국들에게 반한여론을 불러일으켜 우방 정부로 하여금 반한정책을 쓰도록 유도하여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국내 반정부.......
 
1972.11.10 동경외신구락부 연설을 통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경고하고자 한다 만일 지금에 와서 미국 그리고 아세아의 강대국으로 등장한 일본이 종래의 무기지원에 있어서의 정책적 과오에 대하여 일대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자유도 빵도 없는 아세아 각국의 인민은 빵이라도 보장되는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고 하고
 
1973.2.23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을 통해 "한국이 자유도 빵도 없는데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해도 빵이 봅장된다 나의 이런 입장은 북한공산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다"고 하고
 
동년 3.21 일본 하꼬네에서 개최된 민족통일협의회 등 소위 베트콩파 단체간부들의 입관법 연수회에서의 강연을 통해 "나는 결코 통일하면 공산당을 죽이는 그런 반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요 승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공산당의 존립을 보장해주어야 하며 이북에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엄연한 정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고
 
4.24 미국 시애틀 소재 워싱턴 대학에서의강연 및 1973.7.6 미국 워싱턴 소재 메이후라워호텔에서 개최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발기인대회 강연을 통해 "괴뢰 괴뢰하는데 무슨놈의 괴뢰냐 공산주의란 기정사실을 우리는 27년간이나 무시해왔는데 이북은 공산당으로 인정되어 있으나 이남은 민주체제도 안정되지 못했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만 극심할 뿐이다 또한 김일성이 주체성 등을 확립시킨 것은 잘한 일이 아니냐 한국의 6.23 평화통일 외교선언은 동서독처럼 남북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하고
 
5.18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학생회관 강연을 통해 "내가 집권하면 남북연방제와 대중경제를 실시하겠다 교포들은 앞날의 수권태세를 확립하여야 하며 그 방법으로는 청와대와 백악관에 계속 편지를 내어 항의하여야 하고 특히 경제원조의부정사용에 대하여는 백악관에 이를 항의하여 중단하도록 주장하여야 한다"고 하고
 
5.21 재미교포신문 코리어저널지 및 7.1 한민신보 기자와의 대담을 통해 "남북은 한반도에서의 외군철수, 쌍방정권의 인정, 정치경제 제 분야의 전면적 교류를 통해 급속한 동질성 회복하고 연방제를 만들고 통일 후의 5년간은 거국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하고
 
7월경 일본에서 발간된 '독재와 나의 투쟁' 책자에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 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온 남북평화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 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는 등 각종 기자회견 시국강연 책자 출판 등을 통해 북괴의 통일전선과 선전선동에 동조 찬양하는 주장을 하는 등 반국가활동을 하여 오다가 1972.7.6 위 메이후라워호텔 회의실에서 재미 반한교포 임창영 안병국 동원모 김성동 정기용 등 300여명과 회합하여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국본부를 결성, 명예회장이 된 다음 지리적으로 대한민국과 인접되어 있고 북괴 및 조총련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반한세력이 준동하는 일본을 자신의 집권투쟁의 근거지로 하기로 결심하고
 
북한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반국가단체이며 재일조선인총연합도 북한공산집단의 지령에 따라 대남적화통일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라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1973.7.8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미국에서 도일하여 동일부터 동향 출신인 동경거주 재일교포 김종충의 주선으로 동경 신주꾸 호총정2정목105 원전맨션809호실에 한국민주제도통일문제연구소 동경사무소라는 명칭의 사무실을 개설하고 한민통 결성준비에 착수하여 동조자를 물색함에 있어 재일교포 배동호는 1971.1.31 조총련의 지령에 따라 일본 유학생 이동일을 포섭 시도하다가 동인의 정체가 탄로되어 동년7경 민단에서 제명되고 1972.8.2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소위 남북연방제 방식에 의한 남북통일 실현을 반대하는 세력과 투쟁할 목적으로 조총련과 야합, 민족통일협의회를 결성하여 수석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베트콩파 단체들을 규합, 반국가 민단파괴활동을 주도한 자이며 동 김재화는 1967,5 제7대 국회의원 선거시 신민당 전국구 후보로서 조총련 자금을 반입한 혐의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조총련과 공동으로 한일회담 및 월남파병을 반대한 자이고 동 곽동의는 김재화의 사위이고 1971.8 동 김상현으로부터 조총련의 배후조종을 받아 활동한다는 사실과 1972.2 방일시 주일한국대사관 성면미상 직원으로부터 북한에 왕래한 사실이 있어 사상적으로 불순하니 접촉하지말라는 경고를 받은 사실이 있는 자이고 동 정재준은 베트콩파 조직자금지원자로서 민단 구 동경본부 단장으로 반국가활동 및 민단파괴 공작을 주도하고 7.4공동성명 이후 조총련 동경본부 위원장 한익수와 연계 활동한 자이고, 동 김종충, 조활준, 김은택, 김군부 등 역시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재일거류민단 조직을 파괴하고 북괴선전활동을 하다가 그 정체가 탄로되어 1971.7 민단에서 축출된 소위 베트콩파 등과 일원으로서 반국가활동을 주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7.4공동성명 발표 이후에는 광복절 삼일절 등 국경일 기념식과 신년 하례행사 등을 조총련과 공동개최하는 자 등임을 확인하였음에도 동인 등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기로 하고
 
위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정재준 등이 모금한 일화 1740엔이 조총련 등으로부터 염출된 불순한 자금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이를 제공받아 한민통을 결성하기로 하고
 
그들이 운영하거나 관계하고 있는 민족시보는 위 배동호가 의장인 민족통일협의회의 기관지로서 조국통일의 전망이라는 제하에 김일성 수상은 독재자 박정희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등을 운운하며 북괴를 선전하고 개정된 북고 헌법 전문 게재 등의 방법으로 북괴정치노선을 선전 찬양하며 한국의 6.23외교선언을 비난하고 남북분단 고정화에 절대반대는 북괴노선을 지지하고 고려연방 공화국으로 라는 제하에 김일성 사진과 연설내용을 일면에 게재하는 등 북괴 정책선전 등으로 북괴 및 조총련의 활동을 비호하고 이들의 선전 선동에 동조하는 한편 민단활동과 대한민국정부시책을 극렬히 비판하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위 민족시보를 한민통의 기관지로 채택할 것을 결의하고
 
1973.7.13,14 00경 동경소재 프라자호텔에서 위 배동호 김재화 조활준 김종충 김군부 등 베트콩파 6개단체 대표와 회합하여 동인들에게 지난 7.6미국 워싱턴에서 교포 안병국 암창영 김상돈 등과 함께 한민통 미국본부 발기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현재와 같은 당신들의 분산된 조직으로서는 소기의 목적달성에 효과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일본에도 한민통을 만들어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 라는 등으로 한민통 결성의 필요성과 취지를 설면하여 동인들과 한민통을 결성할 것을 합의한후,
 
동년 8.4 10 00경 동경 파레스호텔에서 위 배동호 김재화 조활준 김종충 등과 재차 회합하여 동월 13 한민통의 발기대회를 열고 동월 15,10 ..00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동 선언대회를, 광복절 경축행사와 겸하여 개최할 것과 피고인이 동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고 한민통의 결성을 선언하기로 하는 한편, 한민통의 강령을
 
1. 파쇼적인 1인 체제를 분쇄하고 민주헌정체제를 회복한다
1. 경제의 대외의존성을 지양하고 민족경제의 자주적 발전을 도모한다
1. 비동맹 다원외교를 실시하여 국위선양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
1. 한반도를 중립화하고 남북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
 
등으로 정하고 의장에는 김대중, 부의장에는 김재화, 정재준, 김용원, 상임고문 배동호, 고문 양상기, 김재술 유석준 사무총장에 조활준, 조직국장 곽동의, 국제국장 김종충을 각 취임시키기로 확정하고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면서 동시에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날 김대중도 학생·노조소요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동교동 자택에서 수경사 헌병단에 의해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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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전두환대통령 각하, 국사에 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게서도 아시다싶이 본인은 교도소생활이 이년반에 이르렀아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증과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충분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읍니다. 본인은 각하게서 출국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서 이, 삼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읍니다. 아울러 말씀드릴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절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1982년 12월 13일<br />김대중}}
 
=== 법원의 재판 ===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재판장 문응식, 관여 박명철,이재흥,여운건,양신기)는 1980년 9월 19회 공판기일에 [[김대중]]에 대하여 내란음모 [[국가보안법]]위반 [[반공법]]위반 [[계엄법]]위반 외국환관리법위반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내란음모와 계엄법위반으로 [[문익환]] 징역20년, [[이문영]] 징역20년, [[예춘호]] 징역12년을 선고하고 [[고은태]](시인 [[고은]]) 징역15년을 선고했다. [[김상현]] 징역10년 [[이신범]] 징역12년 [[조성우]] 징역15년, [[이해찬]] 징역10년, [[이석표]] 징역7년, [[송기원]] 징역10년, [[설훈]] 징역10년, [[심재철]] 징역5년을 선고했으며 [[고은태]]와 [[이해찬]]은 계엄법위반 교사이다. 계엄법위반으로 [[김종완]] [[한승헌]] [[이해동]] 징역4년, [[유인호]] 징역3년6월, [[송건호]] 3년6월 [[이호철]] 징역3년6월, [[서남동]] [[김윤식]] [[한완상]] 징역2년6월, [[이택돈]] 징역2년 [[김녹영]] 징역4년을 선고받았다.
 
육군계엄고등군법법회의(재판장 유근환 심판관 백영기 법무사 장동완 김진흥 김익하)는 1980년 11월 3일 항소심 선고공판을 열고 피고인 [[김대중]]의 항소를 기각하고 문익환에 대해 징역15년 선고하는 등 7명에 대해 원심을 파기, [[문익환]] [[송건호]] [[한승헌]] [[유인호]]는 감경됐고 [[김윤식]] [[이택돈]] [[김녹영]]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대법원이 1981년 1월 23일 상고를 기각하고 정부가 김대중에 대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였다.
 
===외국의 김대중 구명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