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민토레 판파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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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민토레 판파니'''({{llang|it|Amintore Fanfani}}, [[1908년]] [[2월 6일]] ~ [[1999년]] [[11월 20일]])는 [[이탈리아]]의 정치인이다. 노동부 장관([[1947년]] [[5월 31일]] ~ [[1950년]] [[1월 21일]]), 농업부 장관([[1951년]] [[7월 26일]] ~ [[1953년]] [[7월 16일]]), 외무부 장관([[1958년]] [[7월 1일]] ~ [[1959년]] [[2월 15일]], [[1965년]] [[3월 5일]] ~ [[1965년]] [[12월 30일]], [[1966년]] [[2월 23일]] ~ [[1968년]] [[6월 5일]]), 내무부 장관([[1953년]] [[7월 16일]] ~ [[1954년]] [[1월 12일]], [[1987년]] [[7월 28일]] ~ [[1988년]] [[4월 13일]])을 역임했다.
 
3차례([[1968년]] [[6월 5일]] ~ [[1973년]] [[6월 26일]], [[1976년]] [[7월 5일]] ~ [[1982년]] [[12월 1일]], [[1985년]] [[7월 9일]] ~ [[1987년]] [[4월 17일]])에 걸쳐 이탈리아 상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5차례([[1954년]] [[1월 18일]] ~ [[1954년]] [[2월 10일]], [[1958년]] [[7월 1일]] ~ [[1959년]] [[2월 15일]], [[1960년]] [[7월 26일]] ~ [[1963년]] [[6월 21일]], [[1982년]] [[12월 1일]] ~ [[1983년]] [[8월 4일]], [[1987년]] [[4월 17일]] ~ [[1987년]] [[7월 28일]])에 걸쳐 이탈리아의 총리를 역임했다.
 
== 초기 생애 ==
[[토스카나 주]] [[아레초 현]]의 [[피에베산토스테파노]]에서 태어난 판파니는 전쟁 이후의 [[검사]]와 [[기독교민주당 (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의 선구자 인민당의 지지자의 아들이었다. 그의 모친은 매우 신앙심이 깊었다. [[밀라노]]에 있는 [[사크로 쿠오레 가톨릭 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수학]]와 [[물리학]]에서 뛰어났으나 후에 [[정치 경제학]]을 전공하기로 선택하고 [[1932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경력 ==
=== 교수와 정치인 ===
판파니는 대학 교수와 정치인의 이중 경력을 수행하였다. 경제사의 학생으로서 그는 다수의 종교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개발을 다루는 중요한 전문의 저자였다. 그의 학위 논문은 〈가톨릭, 자본주의와 개신교〉로서 [[이탈리아어]]로, 그러고나서 [[1935년]] [[영어]]로 발간되었다. 판파니는 [[1936년]] 밀라노 가톨릭 대학교에서 의장직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 동안에 그는 [[수도원]]의 독방에서 금욕적으로 살고 맨발로 걸어다닌 "작은 교수들"로 알려진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남자들은 전쟁 이후의 기독교민주당의 자유당파 민주주의 의안 제출권의 핵심을 형성하였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그는 [[베네치아 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1943년 군복무에 요구된 판파니는 [[스위스]]로 피난을 가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는 [[제네바]]와 [[로잔]]의 대학들에서 수련의 아탈리아인들을 가르쳤다. [[1955년]] 후 그는 [[로마 대학교]]에서 전교직원에 복무하였다.
 
그의 정치 경력은 [[파시스트]] 정권 동안에 [[가톨릭]] 청소년 단체들, 특히 이탈리아 가톨릭 대학 연합과 라우레티 (가톨릭 대학 졸업생들)에 자신의 참가와 함께 시작되었다. 전쟁의 말기와 함께 판파니는 기독교민주당의 최연소 당수들의 하나와 당수 [[알치데 데 가스페리]]의 부하로서 나타났다.
 
===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균형을 이루며 ===
유능한 행정관과 조직자인 판파니는 사회적으로 더축 진보적인 기독교민주당의 좌익을 대표하였다. 자신의 정치에서 자신의 학문적인 흥미들에로서 판파니는 항상 자본주의와 기독교 사이에 긴장들을 분석하는 데 분투하였다. 자신의 독실한 기독교 믿음과 계통에서 그의 목적은 자유 기업의 적은 자선적 관점을 완화하고 자본주의를 더욱 사회적으로 의식적인 영혼과 함께 주입하는 것이었다.
 
[[1946년]] [[6월]] 판파니는 유효하게 [[1948년]] [[1월 1일]] 새로운 헌법을 기안한 [[제헌 국회]]에서 [[아레초]]-[[시에나]]-[[그로세토]]를 대표하는 데 선출되었다. 헌법의 가장 첫 조항은 판파니의 업무들과 [[철학]]을 반사하였다. 견고하게 반공주의자이나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판파니는 "이탈리아는 공사에 창립된 민주주의 공화국이다"라고 읽은 조항을 제안하였다. 결국 받아들여진 그의 제안은 [[공산주의]] 판을 반대하였다 - "이탈리아는 근로자들의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표현에서 겉으로는 해롭지 않은 변화에 의하여 그는 공산주의 방식에서 타고난 계급 연루를 피하였다.
 
[[파일:Amintore Fanfani comizio.jpg|thumb섬네일|left왼쪽|1960년대에 [[기독교민주당 (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 대집회에서]]
[[1948년]] 그는 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노동부 장관으로서 데 가스페리의 4차, 5차와 6차 내각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 동안에 그는 근로자, 정부와 고용인들에 의하여 공동으로 융자된 근로자들의 주택들을 건설하는 데 7년 계획의 운영으로 들어갔다. 판파니는 도한 공산주의 통치의 노동총연합의 독점권을 깬 반공 노동 연합의 창조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51년]] 그는 농업부 장관으로서 내각 순위를 보유하였고 토지 개혁들을 촉진시켰다. [[1953년]] 그는 [[주세페 펠라]] 아래에서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2차례의 기독교민주당 사무 국장(1954 ~ 59, 1973 ~ 75)이 되었다.
 
=== 정치적 절정 ===
[[1954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당과 국내 정치 양쪽에서 판파니의 영향력은 그 절정에 놓였다. 판파니는 정부들의 일련에서 총리를 지냈으며, 그 어떤 기간들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54년 그의 첫 정부는 21일까지 밖에 못갔다. 후에 그는 [[1958년]] [[7월]]부터 [[1959년]] [[1월]]까지, [[1960년]] 7월부터 [[1962년]] [[2월]]까지, 1962년 2월부터 [[1963년]] [[5월]]까지 정부의 우두머리를 맡았다. [[1965년]]부터 [[1966년]]까지 판파니는 [[유엔 총회]]의 의장을 지냈다. [[1972년]] 그는 이탈리아 상원의 종신 상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3회의 상원 의장(1968 ~ 73, 1976 ~ 82, 1985 ~ 87)으로 선택되었다.
 
[[파일:John F. Kennedy and Amintore Fanfani.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는 판파니]]
[[알도 모로]]와 함께 1960년대 초반에 판파니는 중도좌파 연정의 개척자가 되었다. 즉시의 전쟁 이후의 시기 동안 데 가스페리의 연합 정부들은 견고하게 반공주의로 지내왔고, 우파의 사회민주당, 자유당과 공화당의 연정에 기초를 두었다. 하지만 1950년대 동안 기독교민주당에 성직자의 영향이 감소되었고, 자유주의적 [[교황]] [[요한 23세]]가 [[1958년]]에 선출되었으며, [[이탈리아 사회당|사회당]]은 [[이탈리아 공산당|공산당]]과 자신들의 인연들을 느슨하게 하였다. 좌익에 연정들이 이제 가능하게 되었고, 판파니는 이 방향에서 자신의 당을 지도하였다. [[1962년]] [[1월]] [[나폴리]]에서 열린 기독교민주당 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는 좌익으로 문을 여는 데 투표하였다. 중도좌파의 연정 프로그램은 정치적 권력의 연습, 전자 산업의 국유화, 교육 제도의 민주화, 지방 정부들의 확장과 농업에 향상들에서 집단들에 의한 참가를 늘이는 데 요구하였다. 외교 정세에서 프로그램은 서방과 이탈리아의 제휴를 다시 확인하였으나 동서간 긴장들의 진정시키는 일하는 데 보증하였다.
 
[[1986년]] 이탈리아 정부가 위기에 처할 때 [[프란체스코 코시가]] 대통령은 판파니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처음에 사회당과 기독교민주당 사아의 중재인을 지냈다. 하지만 이 노력들이 실패할 때 코시가 대통령은 [[1987년]] 새 국회를 형성하는 데 판파니를 의문하였다. 판파니는 다시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었으나 이 직위는 [[4월 28일]] 자신의 정부가 신임의 투표를 패하면서 10일 밖에 못갔다.
 
== 이후의 세월 ==
[[1994년]]까지 기독교민주당 소속이었던 판파니는 그 후로부터 이탈리아 인민당에 입당하였다. 91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이탈리아의 총리}}
60번째 줄:
[[분류:이탈리아의 반공주의자]]
[[분류:유엔 총회 의장]]
[[분류:유엔 주재 이탈리아 대사]]